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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천사’ 요세프 멩겔레(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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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sts, therefore, are responsible for their research, not only intellectually but also morally. This responsibility has become an important issue in many of today's sciences, but especially so in physics, in which the results of quantum mechanics and relativity theory have opened up two very different paths for physicists to pursue. They may lead us - to put it in extreme terms - to the Buddha or to the Bomb, and it is up to each of us to decide which path to take.
그래서 과학자들은 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그들의 연구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책임성은 오늘날 많은 과학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특히 물리학에서 그렇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물리학자들이 추구할 두 개의 서로 다른 길을 열어 놓았다. 극단적인 말로 이야기하자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은 우리를 부처에게 인도할 수도 있고 핵폭탄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어느 길을 택할 지는 우리(과학자들) 각자가 결정할 문제다” –프로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1939~)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과학저술가,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저자-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조그만 더 이야기하자. 나치가 본격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나선 것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유대인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SS로 약칭되는 친위대 최고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SS특별임무부대(SS Einsatzgruppen)을 A, B, C, D의 4개 지대로 편성하여 진격하는 국방군의 뒤를 따라 소련 영내에서 각종 처형임무에 투입하였다. 이 부대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임무를 수행했다.

처음에는 총살, 탄약부족으로 가스실 개발

나치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유대인 말살정책의 총책임자로 수용소에서 가스실 학살을 지시한 것도 그의 작품이다.

이들이 처형한 이들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정치장교 등이었다. 처음 이들의 처형 방법은 직접 총살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을 총살했지만 한계가 분명히 나타났다. 우선 처형 속도가 문제였으며 이와 더불어 탄약 문제도 심각했다. 둘째 부대원들에게서 심리적인 부작용 현상이 발견되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한 히믈러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할 것을 지시했다. 여러 가지 방법 중에 S트럭 (Sonderwagen, Special Truck)이라는 것이 실험됐다. 나치 독일이 특히 여자와 어린이들을 학살하기 위해 개발한 가스 트럭으로 자동차 배기가스를 이용해 학살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S트럭은 대단히 불결한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배기가스 중독으로 인한 질식으로 구토 및 똥, 오줌 등 배설물들이 배출됐기 때문이다. 이 트럭은 1942년 몇 개월간 사용되다가 처형대원들의 불만을 사 폐기됐다. 사용한 가스는 차량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였고, 우크라이나,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에서도 이용되었다.

다시 기존 강제수용소와 S트럭에서 사용한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독가스를 이용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이다. 앞서 언급한 화학의 천재 하버가 개발한 맹독성 가스 치클론B를 이용한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만행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에서는 한 번에 약 2천여 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수용소 도착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죽음의 천사’ 멩겔레가 바로 그 책임자였다.

하버가 개발한 맹독성의 치클론B 사용

독가스실은 대개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 학살했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B였다. 제조사인 훽스트사는 전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가담전과 때문에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다.

또한 훽스트사는 1990년대 낙태시키는 약을 제조했다가 “나치독일 시절에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더니 이제는 태아를 학살할 생각이냐?”는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다.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현재 독일 역사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총 책임자는 히틀러의 최고 측근인 하인리히 히믈러였다. 그는 SS 친위대사령관이었으며 또한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를 지휘했다. 지휘했다. 학살은 특별히 유대인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그와 그의 부하들이 고안해낸 것 가운데 "Sonderbehandlung", 즉 "특별대우(Special Treatment)"는 SS식 완곡어법으로 가스실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자 자살하였다.

유대인 말살 지휘 책임자 히믈러는 청산가리로 자살

나치가 취한 유대인 절멸정책은 역사상 가장 잔악한 전쟁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희생자수가 그 동안 너무 부풀려 과장됐다는 지적이 많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희생자 수 100만 명이 정설로 간주되고 있다.

2차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자 히믈러는 옛 동료들이나 연합군에 체포되는 것을 피해 덴마크국경 근처에 있는 플렌스부르크 부근에서 며칠 간 숨어 지냈다. 그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주요 전쟁 범죄자로 다른 고위 간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연합군 정보기관들은 히믈러를 체포하기 위해 플렌스부르크 근처를 이 잡듯이 뒤졌고 그의 사진도 점령지역에 뿌려졌지만 그의 행방을 찾아내는 데는 실패했다.

체포를 피하면서 히믈러는 바이에른으로 갈 생각을 하며 헌병으로 위장했다. 그는 수염도 깎았으며 그의 상징인 뿔테 안경도 벗었다. 한 쪽 눈을 가리는 안대도 착용했고, 완벽하게 위조된 신분증을 소지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게 연합군의 관심을 끌었다.

5월 21일, 히믈러는 충실한 부하 몇 명을 이끌고 피난민 대열에 섞여 브레멘으로 향했다. 브레멘으로 향하는 길에 영국군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다. 그는 위병에게 하인리히 히칭가라는 이름의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러나 위병이 이 신분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신분증명서가 없었는데 아주 새로운 증명서를 내밀었던 것이다.

위병이 다른 두 명의 동료를 불러 히믈러를 체포했다. 그러나 이 병사는 아직 그가 하인리히 히믈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영국군은 히믈러를 일단 근처 포로수용소의 독방에 가두고 뤼네부르크의 영국 2군 사령부 정보부에 신분 확인을 요청했다.

독방에 갇힌 히믈러는 자신의 신분이 곧 발각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수용소장에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 요청하여 수용소장에게 불려갔다. 수용소장 앞에 선 힘러는 "Ich bin Heinrich Himmler! (내가 하인리히 히믈러다!)"라며 신분을 밝히고 영국군 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을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히믈러는 즉시 뤼네부르크의 영국 2군 사령부로 압송되어 정보부에 넘겨졌다. 군의관이 달려와 그를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청산가리 캡슐을 숨기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당시 몇몇 나치 고위 간부들이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놓았다가 그걸 씹어 자살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군 군복으로 갈아 입은 히믈러는 다시 독방에 갇혔다. 몽고메리 사령부에서 정보부의 마피 대령이 와 히믈러를 살폈다. 대화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조치가 적절히 취해졌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마피 대령은 히믈러의 입안도 조사했냐고 물었다. 군의관이 히믈러를 다시 조사하기 위해 불려왔다.

입 안을 열라는 의사의 지시에 힘러는 순간 입안에 숨겨놓은 캡슐을 깨물었고 곧 쓰러졌다. 군의관이 히믈러의 위를 세척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것이 히믈러의 최후였다.

희생자 수 연합군측 부풀려, 이제는 100만 명이 정설로

한편 시간이 지난 후 강제수용소에서 학살된 희생자 수에 대해서 여러 논쟁이 있었다. 연합군과 유대인 측에서는 무려 1천200만이나 되는 수감자가 살해됐다고 부풀려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관연 이토록 많은 수감자를 수용하고 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 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 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 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쓰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 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 명으로 추산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대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양심수,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민족 등이었다.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 명으로 쓰고 있다.

어쨌든 인종말살이라는 극악한 전쟁의 소용돌이 시대에 우생학과 인종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총명하고 전도유망한 의사 멩겔레는 악마의 화신이라는 악역을 맡게 된 것이다. 비록 SS친위대 소속이었지만 그의 중요한 역할에 비해 그의 계급은 고작 대위라는 초급장교에 불과했다. 그는 명령을 하는 군인이 아니라 명령을 받아 임무를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유대인을 비롯해 수감자들을 해충으로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계속)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