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0)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클레멘타인 15

샤워를 끝낸 미소보살이 말없이 시야의 한 끝을 지나갔다.
노래가 끝날 때쯤이었다.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처럼 민첩하고 고요한 걸음새였다. 노래하고 춤추던 애기보살이 환히 웃으면서 어머니를 향해 손 흔들며 눈인사까지 보냈으나 미소보살은 끝내 이쪽을 보지 않았다. 미소보살의 역할은 다 끝난 모양이었다. 그 방을 나가면 내가 이사장을 면회하면서 처음 들어와봤던 너른 거실이었다. 거실 창은 어두컴컴했다. 괴목 차탁과 죽은 부처들과 낡은 서책들 사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 없이 가로질러 가는 미소보살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났다.
이사장의 명을 받았는지 애기보살이 밝은 스탠드의 불빛을 반으로 줄이더니 키드득 웃으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어떻게 고갯짓을 해도 이사장은 보이지 않았고, 이사장 방향으로 내달려간 애기보살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조명은 이제 어스레했다. 애기보살이 이사장을 향해 내달렸다는 건 내 느낌에 불과했다. 이사장의 품으로 어린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 들어간 것도 같고 태권브이 소년처럼 붕 날아 들어간 것도 같았다. 사위는 조용했다. 이사장은 이미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하나의 신기루를 본 느낌이 들었다.

나는 뒤꿈치를 들고 명안전 뒤란을 돌아 나왔다.
명안전에서부터 단식원을 비롯한 조립식 건물들이 여러 겹의 층을 이룬 요사체까지는 경사를 따라 활대처럼 휘어져 흐르는 길이었다. 명안전 앞뜰로 나오자 길 끝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미소보살이 허리를 조금 수그리고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워낙 상반신이 큰 사람이라 어두운 복색을 한 커다란 곰이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머물러 있는 것처럼, 미소보살은 아주 천천히 걸어 한 건물 속으로 가만히 사라졌다. 역시 신기루 같은 풍경이었다.

멀리, 경비실에서 불이 잠깐 밝아졌다.
경비원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듯했다. 나는 경사로 위의 잡목 그늘로 쓰윽 자맥질해 들어갔다. 길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천천히 숲을 우회해 주차장 너머의 암벽에 달라붙었다. 랜턴을 켜 든 경비원이 순찰을 위해 문화궁을 돌아 명안진각 뒤쪽으로 올라가는 게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보다 힘이 좀 빠진 것 같았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내부에서 생성됐던 에너지가 아침이슬처럼 시시각각 소멸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힘도 빠져 암벽 모서리를 붙잡는데 악력이 모자라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암벽을 다 오를 때까지 두 번이나 쉬어야 했다. 바람도 불지 않는 밤이었다. 달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암벽 위에서 한참이나 숨을 고르며 명안진사를 내려다보았다. 명안진사는 별빛 아래에서 태곳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도 간절하게 여린이 그리웠다. 밑도 끝도 없이 다가든 그리움이었고, 폭력보다 더 폭력적인 그리움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 차라리 통증이었다. 명치가 찢어지는 고통이 왔다.

어금니를 질끈 물고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숲 사이로 걸었다. 나뭇가지들이 달려들었다. 눈두덩이 조금 찢어진 듯했다. 피가 배어 나왔다. 내부의 통증은 이제 명치를 찢고 간장(肝臟)을 찢고 염통을 찢었다. 올 때와 달리 나는 상처받은 짐승이 되어 걷고 있었다. “여기서 보는 놀은 진짜 황홀해요.” 여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샹그리라 뒤뜰에 앉아 놀빛을 보고 있던 여린의 환한 모습이 목소리를 따라 나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여린의 환한 모습은 내 어둠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나는 어두운 짐승이 되어 어둠 속을 걸었다.

여린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죽은 자의 방 같았다. 샹그리라의 모든 방이 다 캄캄했다. 그것은 다만 죽음의 고성처럼 우뚝할 뿐이었다. 피뢰침 같은 운악산도 캄캄하기로는 마찬가지였다. 검은 망토가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어떤 살인도, 이를테면 자기살인의 의지조차도 그 어둠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포악한 그리움에 속수무책으로 끌려와 쓰러져 누운 채, 암벽 바닥을 이윽고 탁 쳤다. 말굽은, 없었다. 손바닥만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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