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리의 서울 트위터] 지하철에 ‘배려’라는 향수 뿌리세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오늘은 그녀에게 무척 힘든 날입니다. 얼마 전부터 섭섭하게 하던 남자친구가 이제는 대놓고 딴청을 피운답니다.

연락도 잘 안 하고, 심지어 ‘살 빼라’고 했다네요. 회사 동료는 얼마나 얄밉게 구는지, 듣고 있는 제가 화가 납니다. 저녁에 맥주 한잔 하기로 한 친구는 약속을 깼군요. 이런. 그녀가 누구냐고요? 여기는 지하철, 제 옆자리에 앉은 분입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 듣고 말았네요. 압니다. 당신의 분노, 당신의 좌절 모두 다 이해합니다. 사랑해서 참고, 직장이기에 인내한 날들. ‘내가 참자’며 허벅지를 수십 번 꼬집었겠죠. 피멍 든 다리로만 따지면 집 앞에 열녀문이라도 세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 옆에 앉은 저는요? 집까지 한 시간.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하느라 성할 날 없었던 제 무릎. 은전 한 닢도 아니고 단지 이 자리가 갖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 달 동안 10페이지밖에 못 본 소설을 읽으려고 했을 뿐이라고요. 그런데 당신, 왜 하필 제 옆에 앉으셨나요. 전화만 하면 다행이게요. 이런 분들, 웬만하면 TV(DMB 폰)를 켭니다. 이어폰도 없이 볼륨을 올릴 때, 옆 좌석에선 혈압이 올라가죠.

 소심한 저, 트위터에 ‘처방비법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스마트폰 이용자들에게선 “방해전파 어플을 만들자”는 농담이 나오네요. “정말 혼내주고 싶다”는 분들이 대다수.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되레 험한 꼴 당할 수 있으니 옆 칸으로 옮겨 탄다”에 머뭅니다. 기껏해야 노려볼 뿐이죠. 서울메트로 측도 안내방송과 홍보물 부착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며 고민 중입니다.

 지하철은 사람냄새가 얽히고설키는 공간입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목덜미에서 나던 향을 풍기는 할머니, 고기 굽던 냄새를 통째로 안고 탄 아저씨…. 그런데 코끝에 닿는 그 수많은 냄새 중에 가장 달콤한 건 ‘배려’에서 나는 향기가 아닐까요? 옆자리에서 침 흘리며 자고 있는 어린 학생을 위해 목소리를 낮추고, 이어폰을 껴주세요. ‘배려’라는 향수는 비싸지 않답니다.

임주리 기자

twitter.com/ohmaju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