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두 시간짜리 승용차 ‘인생 레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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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31면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는 비행기나 기차나 자동차로 여행할 때 피로를 훨씬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큰 축복이지요. 단, 희한한 것이 하나 있긴 합니다. 자동차 여행을 할 때는 두 시간만 넘기면 몹시 피곤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다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엄마입니다.

여섯 살 때부터 한 달에 한두 번,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의 자가용으로 원주발 서울행 레슨을 다니던 길 위의 삶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절정을 맞이했습니다. 꼬마 제자의 첫 오케스트라 협연 무대가 염려되신 선생님 덕에 막판에는 서울을 오가는 일이 주 5회로까지 늘어난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이신 엄마가 보충수업 시간을 이래저래 교체하면 보통 오후 서너 시를 넘겨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반복되는 상경길에 저는 무얼 했느냐고요. 제일 많이 한 것은 책읽기였습니다. 덕분에 시력은 또래 중 최하가 됐지만 식탁에서도 책을 놓지 못하던 당시 저에겐 그 시간이야말로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한 일은 잠자기였습니다.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잘 수 있는 체질 덕에 저는 차 안에서도 세상 모르고 잘만 잤습니다.

그럼 엄마는 무얼 했느냐고요. 물론 엄마는 운전을 했습니다. 차에 타면 엄마는 늘 무사히 다녀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제일 먼저 합니다. 그 다음 저에게 “이제 자” 하고 말합니다. 그 한마디에 잠이 든 저는 “다 왔어”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깨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댁에 도착해 레슨이 시작돼도 엄마는 쉬지 않았습니다. 녹음기로 레슨을 녹음하면서도 엄마는 노트에다 두 시간을 훌쩍 넘는 레슨 내용을 일일이 받아적었습니다. 타고난 낯가림 덕에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나 겨우 하는 저 대신, 선생님과의 의사소통도 엄마 몫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레슨을 어떻게 받았느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레슨을 잘못 받은 날, 즉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날은 주로 레슨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같이 들었습니다. 듣는 도중 엄마가 “이것 봐, 내가 이미 이렇게 얘기했었지” 하면 제가 “알았다니까” 하며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서울을 벗어날 때쯤 되면 엄마는 저에게 매번 똑같은 것을 시킵니다. “빨리 선생님께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해!” 그럼 저는 잠자코 임무를 완수하고는 바로 꿈나라로 가 버리는 겁니다.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날에는 뭘 했느냐고요. 라디오를 같이 들을 때가 많았습니다.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는데도 취향이 무척 까다로운 엄마는 유명한 거장들의 연주도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별론데?” 하며 비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건 정말 좋다” 하며 둘 다 넋을 놓고 귀를 기울이는 시간도 그만큼 많았지만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제가 학교에서 배운 리코더를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온 날이면 세상에서 가장 조촐한 음악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성악 전공을 고민했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엄마가 제 리코더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제가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자 우리는 주로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걔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니까! 나라면 절대 안 그러겠다!” 하면 엄마는 “그래. 근데 걔는 너가 아닌 걸? 사람은 모두 달라” 했고, 엄마가 “뭐든지 성실한 게 최고야” 하면 저는 “예술가는 꼭 그런 건 아니야!” 하며 토를 달기도 했습니다. 엄마도 제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관심 있어 하던 역사 또는 음악 이야기, 때때로 엄마가 가르치는 반 학생들의 이야기, 동료 선생님들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우리 가족 이야기 등등. 물론 유달리 친구가 많았던 그 당시의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때 엄마의 친구는 나 하나였다는 걸.

그렇게 원주로 돌아오면 대부분 자정을 바라보는 캄캄한 밤, 우리는 언제나 그날은 몇 시간 걸렸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여행을 마쳤습니다. 두 시간을 넘기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가끔 그것보다 덜 걸렸으면 “와, 오늘은 정말 빨리 왔네” 하며 기뻐했고요.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두 시간이 넘으면 자다가도 깨면서, 몸이 갑갑해지고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 그러고는 불현듯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항상 두 시간 만에 잘만 갔는데…’ 하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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