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큰'뮤지컬과 포퓰리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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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05면

올해 초연된 대형 창작 뮤지컬 중 최고 화제작은 '피맛골 연가'다. 서울시가 주도해 지난 9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흘 남짓 공연됐다. 이 뮤지컬은 특히 1막이 볼만 했다. 스토리는 비록 상투적이었지만, 주연 배우 박은태·조정은의 소름끼치는 가창력과 풍성한 무대 전환, 가슴을 치는 음악과 인상적인 엔딩 신 등이 어우러져 강렬했다. 반면 2막은 난감했다. 갑자기 의인화된 쥐가 무대에 나와 춤추고 노래했다. 우화인지, SF인지 도통 구분이 안 되는 요상한 뮤지컬이 되고 말았다. 대다수 관객은 “2막 어이 없음”이라며 씹어댔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그 가격에 이 정도면 됐지, 2막까지 훌륭하길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라고 했다.

최민우 기자의 까칠한 무대<42>

그 가격이라니? '피맛골 연가'의 최고가는 5만원이었다. 그것도 대개 20% 할인을 해 4만원이면 좋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싼 뮤지컬은 없었다. '착한 가격'이란 말까지 나왔다. 서울시가 주도했기에, 많은 시민이 부담 없이 뮤지컬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런 파격가를 택했을 게다.

하지만 값이 싸다고 다 좋은 걸까. '5만원 뮤지컬'은 시장 교란의 주범이다. 예술의전당·세종문화회관·국립극장 등 메이저 공연장의 최근 뮤지컬 티켓 값은 'VIP석=13만원'이 대세다. 이런 시장 가격에 비해 절반에 한참 못 미치는 '5만원 뮤지컬'이, 그것도 관에 의해 불쑥 튀어나오면, 그건 기존 뮤지컬 제작사들 다 망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논란이 됐던 5000원짜리 '통큰 치킨'에 비유하자면, 민간 뮤지컬 제작사는 동네 영세업자이며, 서울시는 롯데마트로 치환시킬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울시나 세종문화회관에 찍힐까 봐 뮤지컬 제작자들은 피켓을 들지 못한다는 점뿐이다.

가격이 싼 덕에 관객은 꽤 들어찼다. '피맛골 연가'의 유료 점유율은 74%, 매출액은 4억5000만원이었다. 대신 이 뮤지컬을 만드는 데 든 돈은 15억원을 넘었다. 10억원 이상 손해를 본 거다. 이 돈은 서울 시민이 낸 세금에서 분명 나왔을 게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어떤 이유로, 누구를 위하여 시민 세금을 이렇게 써야 되는건지 난 모르겠다. '5만원 뮤지컬'은 지금 당장은 구미가 당기는 먹이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론 몸을 해치는 당의정에 불과하다.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망국적 포퓰리즘'운운하는 오세훈 시장은 이 뮤지컬에 대해선 뭐라 할지 궁금하다.

이 얘기가 한국 뮤지컬 가격이 싸다는 건, 결코 아니다. 더 많은 관객이 찾기 위해선, 뮤지컬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선, 뮤지컬 티켓 값은 10만원 밑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하지만 그건 시장에서 결정될 사안이다. 관이 어설프게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만약 이번 '피맛골 연가'를 만들면서 서울시가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 제작비를 10억원 아래로 낮추고, 티켓 값은 현실적인 7만~8만원대로 책정하고, 그래서 수지도 맞춰 한국 뮤지컬 제작의 새로운 전범을 보였더라면, 난 기립박수를 쳤을 것이다.

항공기 1등석을 모두가 탈 순 없다. 세종문화회관 VIP석도 마찬가지다. 지나친 이상(理想)에 사로잡히는 순간, 정책은 왜곡된다. 그토록 서울 시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고 싶다면, 완성도는 조금 떨어지는 '야외 뮤지컬'이나 '찾아가는 뮤지컬'을 하는 게 순리다. 쾌적한 환경과 싼값을 다 바라는 게 진짜 탐욕이다.


최민우씨는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다. '성역은 없다'는 모토를 갖고 공연 현장 구석구석을 헤집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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