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뇌졸중도 해고 통보도 제 꿈은 못 막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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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아시안게임 축구가 열린 광저우 후아궁 경기장에서 포즈를 취한 박해철.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몸이 말을 듣지는 않지만 꼭 패럴림픽에 나가 메달을 따고 싶습니다.” 뇌성마비 축구(뇌성축구) 대표 박해철(23·곰두리사랑회)은 밝았다. 한국 뇌성축구 대표팀은 17일 광저우 후아궁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장애인 아시안게임 준결승에서 이란에 0-7로 완패했다. 박해철은 “세계랭킹 3위 이란은 정말 강했다.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은 랭킹점수가 생기는 대회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한 새내기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량을 발전시켜 패럴림픽이나 세계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박해철은 뇌성축구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국가대표로 뽑혔고 오른쪽 미드필더로 뛰고 있다.

 경남 남해에서 나고 자란 박해철은 초등학교 때 촉망받던 태권도 선수였다. 워낙 발이 빨라 육상 단거리 선수로도 뛰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무리한 운동은 독이었다. 박해철은 “육상대회를 준비하던 1997년 여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쓰러지던 날도 땡볕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훈련을 오래 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머리를 망치로 강하게 맞는 느낌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훈련을 계속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나갔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고 했다. 거품을 물고 쓰러진 박해철을 동료들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다. 뇌졸중이었다. 결국 왼쪽 몸 전체가 마비되는 뇌성마비로 이어졌다.

 ‘장애’보다 ‘마음의 상처’가 컸다. 박해철은 “태극마크를 꿈꿨다. 꿈이 사라지자 죽고 싶었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운동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열정은 숨길 수 없었다. 2007년 대학을 다니던 그는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왔다. 10년 가까이 운동을 쉬었지만 타고난 운동신경은 그대로였다. 가볍게 테스트를 통과해 곰두리사랑회 뇌성축구 선수가 됐다.

 그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 박해철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다. 그는 서울에서 대기업 텔레마케터로 일했다. 주말에는 국가대표를 꿈꾸며 축구를 했다. 그러나 한국 장애인 스포츠의 현실은 냉정했다. 2009년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회사에 장기휴가를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통보였다.

 재취업은 더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텔레마케팅 회사인 효성ITX에 상담사로 입사한 그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해고가 무서워 회사에 말도 못 꺼낸 것이다. 조재덕 곰두리사랑회 감독이 직접 나서 회사를 설득했다. 효성ITX는 흔쾌히 봉급의 50%를 보장하며 “꼭 좋은 성적을 내고 오라”고 응원했다. 박해철은 “생업을 포기할 수 없었는데 배려해 준 회사에 감사하다. 장애인 스포츠를 통해 한국을 알리는 선수가 되겠다”며 활짝 웃었다.

김민규 기자

박해철은 …

▶ 생년월일 : 1987년 10월 13일

▶ 체격 : 1m75㎝, 60㎏ ▶ 가족 : 어머니와 1남1녀

▶ 취미 : 독서, 음악 감상

▶ 학교 : 경남 남해 미조초-남해중-남해고-남해전문대

▶ 포지션 : 오른쪽 미드필더

▶ 주요 출전 대회

2010 한·일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대회

2009 호주 아라푸라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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