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0) 일본과의 수교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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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 도쿄를 방문해 첫 한·일 정상회담을 열었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미국과 일본 요인들이 영접하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김용식 주일 공사,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프란체스카 여사. 두 사람 건너 이 대통령과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모습이 보인다.(당시 직함 기준)


미국은 지금도 대단한 나라다. 1950년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당시의 대한민국에는 더욱 대단했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파상적인 공세에 맞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없었던 대한민국에는 미군이라는 존재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몰고 왔다. 당장 공산군에 맞서 싸울 무기체계와 장비는 물론이고, 국군의 뒤를 받쳐줄 모든 물자를 끌고 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은 모든 것이 모자라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에도 힘이 버겁던 대한민국 정부 당사자들에게는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아이젠하워가 한국 방문을 조용히 마친 뒤 1주일쯤 지났을 때다. 이번에는 아이젠하워와 미 대선에서 맞붙었던 아들라이 스티븐슨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미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아이젠하워와 경합을 벌였다가 결국 낙선한 인물이다. 일리노이 주지사 출신으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다시 낙선했지만 다음 대선에도 출마했다. 아무튼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또 다른 인물이 방한하자 나는 다시 바빠졌다. 나는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과 함께 그를 수행했다. 그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 부대는 물론이고, 신병 훈련소가 있던 제주도 모슬포까지 방문했다. 그의 방한 주요 목적은 하루속히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미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현지의 사정을 둘러보는 데 있었다. 그 역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못지않게 한국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여건 마련에 관심이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군을 어떻게 증강해 단독으로 공산군에 맞설 수 있게 하느냐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방문하는 일선 국군 부대와 미군 부대를 주의 깊게 살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뒀던 부분은 한국군을 미군 못지않은 전투력으로 무장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문제였다. 그는 꼼꼼히 내가 설명하는 모든 것을 적고 다녔다. 나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에게 “미군 1개 사단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으로 한국군 사단 2~3개 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4박 5일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여러 곳을 다녔다. 나는 그에게 한국군을 현재의 10개 사단 규모에서 20개 사단으로 증강할 수 있게끔 도와 달라는 부탁을 자주 했다. 그는 나중에 한국을 떠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군이 매우 훌륭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52년의 마지막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와 스티븐슨 전 대통령 후보의 방한으로 그해의 마지막 달을 정신 없이 넘겼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전선은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간혹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겨울 들어서는 적군에게도 특별한 동향이 나타나지 않았다. 조용히 또 한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에는 모든 것이 어렵던 상황이라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행사가 드물었다.

 나는 그저 새해에 맞이할 여러 가지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53년 1월 4일쯤이었던 것 같다. 부산에 있던 임시 경무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께서 일본을 방문하시는데, 수행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나는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왜 그때 이뤄지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를 따지고 있을 계제(階梯)는 역시 아니었다. 이미 대통령의 일정은 정해졌고, 나는 그를 수행하는 요원으로서 길을 나서야 했던 것이다. 나는 이튿날 부산으로 향했다. 경무대에서 전시 상황에서 요긴하게 사용하던 부산 수영만의 비행장으로 향했다.

 일제강점기의 35년을 치르고 신생 독립국으로 출범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민족에 한(恨)을 품게 했던 식민 통치국 일본을 방문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표정은 어땠을까. 나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더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해외에서 온갖 풍상(風霜)을 다 겪었던 이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경무대에 도착해 이 대통령과 함께 길을 나서면서도 나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담담했으며, 표정은 여느 때와도 전혀 차이가 없었다. 뭔가 마음으로 이미 정해진 방안, 정안(定案)을 담고 있는 눈치였다. 흔들림도 없었고, 일본 방문길에 나서면서 새삼스레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분위기도 없었다.

손원일(1909~80)-초대 해군참모총장

 우리는 조용히 부산의 수영만 비행장에 도착했다. 일행은 단출했다. 이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육군참모총장인 내가 전부였다. 경무대 비서관이 몇 사람 수행팀에 섞여 있었지만, 정작 있어야 할 외교부 장관 등 각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비행장에는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이 보내준 커다란 C-54 수송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의 전용기였다. 비행기 트랩을 올라보니, 조그만 방이 마련돼 있었다. 이 대통령은 그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전용 좌석이 있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비행기는 우리가 오르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둔중한 엔진 소리에 이어 비행기는 곧 날아올랐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보내준 C-54 수송기에 우리가 들어가 앉아 일본으로 날아가는 것은 미국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51년 일본에 대한 군정(軍政)을 종식하고, 일본을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한 그해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뒤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있었다. 국교를 수립하는 문제도 검토 중이었다.

 그런 첫걸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럴 시점에는 와 있는 것일까. 대한해협을 비행기 창 밑으로 내려다보는 내 머릿속으로는 적지 않은 생각이 찾아들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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