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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이 마흔, 아주 다른 상상력 …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두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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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올해 중앙장편문학상을 공동 수상한 고은규(왼쪽)씨와 오수완씨. [김성룡 기자]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두 편이 출간됐다. 고은규씨의 『트렁커』와 오수완씨의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문학에디션 뿔)다. 수상작은 ‘이란성 쌍둥이’를 닮았다. 마흔 동갑내기 작가의 공동 수상이란 점이 흥미롭지만 두 작품의 분위기는 180도 다르다. 고통과 유머의 『트렁커』, 지식과 추리의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탐구한다는 점에선 다름이 없다. 재미와 감동을 두루 갖춘 두 책을 먼저 읽어 봤다.

고은규 『트렁커』 상처 입은 남녀, 어디까지 치유할 수 있을까, 단 경쾌하게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궁으로의 회귀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가장 안전하게 보호받았던 그 시절을 꿈꾸면서-. 고은규(40) 소설 『트렁커』의 주인공은 밤이면 자동차 트렁크에 웅크리고 들어간다. 설정부터 특이하다.

 그들은 왜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됐을까. 여주인공 이온두. ‘온두(溫豆)’, 즉 뜨거운 콩이다. 중국집소녀 캐릭터 ‘뿌까’를 닮았다. 직업은 유모차 판매원. 친절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지만 유모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판다. 암기력은 대단하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유년의 기억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한다. 저도 모르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 쏟아진다. 멀쩡한 집 놔두고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슬트모(슬리핑 트렁커의 모임)’ 정회원이다.

 남주인공 이름. 성이 ‘이’, 이름이 ‘름’이다. 다른 형제들은 돌림자를 쓰는데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름만 ‘이름’이라 지어주고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남긴 이름이 사실은 ‘이룸’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게 된다. 직업은 빌딩 밸런시스트. 건물의 균형을 맞춘다. 세심하고 부드럽다. 외모도 제법 볼 만하다. 그런데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이 사내 역시 트렁크에서 잠을 청한다.

 온두가 독점하던 공터에 름이 자동차를 몰고 들어온다. 영역을 침범 당했다고 여긴 온두는 름과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나 름이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위해 만든 ‘치킨차차차’라는 진실게임을 통해 둘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주인공 캐릭터가 분명하고 매력적이다. 둘의 대사는 까칠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남녀가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에만 주목한다면 분명 로맨틱 계열이다. 그런데 진실게임에서 털어놓는 그들의 과거는 무시무시하도록 무겁고 처참하다.

 일례로 름은 아버지에게 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다. 아버지는 자른 손가락을 변기에 넣어 내려버렸고, 름은 자신이 흘린 피를 스스로 청소하고서야 병원에 가도록 허락됐다. 갈수록 잔인해지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트렁크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 역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또 다른 형태로 상처받은 인물이었다. 그 분노와 저주가 할아버지를 닮은 름에게 향했던 것이다.

 온두의 머리 속에서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숲 속에 주차된 자동차 안의 두 남녀와 ‘까만 아이’다. 여자는 “약 먹으면 사탕 줄게”라 말했지만 까만 아이는 약을 먹는 척하며 몰래 버린다. 얼마 뒤 두 남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죽는다. 까만 아이는 자동차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만 사나운 개떼가 쫓아온다. 까만 아이는 트렁크로 숨어든다. 동반자살하려던 부모들 틈에서 홀로 살아남은 까만 아이의 고아 생활도 끔찍함의 연속이다.

 작가는 한 사람의 비극을 어디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 그 한계를 보여준다 싶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소설을 끊어 읽기 어려울 정도다.

책장을 덮을 무렵, 두 사람이 성인이 돼서도 트렁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까닭에 수긍이 간다. 그런 비극을 경쾌하게 서술하면서 제법 두둑한 유머로 포장한 것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주인공들의 극단적인 아픔을 보면서 인간의 보편적 상처에 공감하게 된다. 존재의 뿌리인 부모가, 고통의 근원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오수완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액션, 로맨스, 반전 …‘책탐’하는 이들의 지적 판타지

당선자 인터뷰(본지 11월 15일자 29면)에서 소개한 대로 오수완(40)씨는 1990년대 초반, PC통신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했다. 본업은 한의사. ‘등단’을 두드린 지 10년쯤 된다. 때문에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그에게 보통 작품이 아니다. 특히 『책 사냥꾼…』은 오씨가 구상에서 집필까지 4년을 투자한 노작이다. 그래서일까. 책은 작가의 평범치 않은 이력 이상으로 독특하다. 소설의 주인공 정도형은 의뢰에 따라 희귀본이나 절판본 책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 주고 사례를 받는 책 사냥꾼이다. 업계에서 ‘반디’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는 굳이 따지자면 책 사랑이 지나쳐 직업으로 책 사냥꾼을 택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찾는 책은 이른바 『세계의 책』. 신과 자연과 우주의 비밀은 물론 개별적인 인간의 운명과 인간의 본질, 모든 아름다운 것, 우주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등을 담은 책이다.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책이다. 소설에서도 『세계의 책』의 실재 여부는 물음표로 남겨둔다. 대신 『세계의 책』을 찾는 데 필요한 ‘안내서’, 그 ‘안내서’를 찾는 데 필요한 안내서가 어지럽게 등장한다.

 있는지도 없는지도 알지 못하는 대상을 찾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여정을 되풀이하는 책 사냥꾼. 해탈이나 초월 같은 궁극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성공하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내용과 감동에 대한 고려 없는 맹목적인 책 추적은 책에 대한 물신화(物神化)마저 연상시킨다.

 작가는 낭만적이면서도 실존적인 내용을 추리소설 구조 안에 녹여 낸다. 비 오는 어느 날 윤 선생이라는 50대의 남성이 과거의 반디, 이제는 책 사냥꾼 업계를 떠나 헌책방을 운영하는 도형을 찾는다. 책을 찾아줄 것을 의뢰하기 위한 것. 도형은 이를 거절하지 못한다. 윤 선생이 지금도 사랑하는 젊은 날의 연인, 김소리의 안전을 위협하며 도형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윤 선생은 희귀본 거래업자들 사이에 전설적인 큰손으로 통하는 ‘미도당’의 운영자다. 센 상대인 것이다.

 도형이 문제의 책을 찾는 과정에서 책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이라는 점, 책들에 붙은 장서표(藏書票·책의 소유 표시를 위해 붙이는 표)를 해독한 결과 엄청난 ‘보물’의 소재를 일러주는 미로 지도였다는 점 등이 차츰 밝혀진다. 액션과 로맨스, 허를 찌르는 반전 등이 끼어들며 소설의 살을 도톰히 한다.

 소설은 진지하지만 현실에서는 좀 떠나 있다. 있을 법하지 않은 거대한 보물의 존재를 상정한 점부터 그렇다. 오씨는 한 술 더 떠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실재 있는 것처럼 소설 이곳 저곳에 교묘히 배치한다. 가령 에밀 에스트번이라는 미국 사진가의 사진집 『얼굴들』이 그렇다. 책 사냥꾼인 에스트번은 역시 책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책과 사람을 혼동, 결국 사람을 살해한 후 사진을 찍는 악행에 빠진다.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수 많은 책들에 관한 대목을 읽으며 독자는 다시 한 번 잘 짜인 허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책탐’이 지나친 사람들이 얽어내는 가상의 모험극. 『책 사냥꾼…』은 말 그대로 지적인 추리소설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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