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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일병 조한승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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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군대 간 남자를 애인으로 둔 여자를 요즘엔 곰신(고무신)이라 부른다고 한다. 군대 가면 여자가 고무신 바꿔 신는다는 얘기에서 나온 듯한데 아무튼 이런 이유에서라도 군대 가기 좋아하는 청년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전쟁이 났을 때 앞장 서 싸우겠다는 애국심 넘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지만 한쪽에선 군대 면제를 받고자 온갖 이상한 일을 벌이는 것도 현실이고, 운동 선수가 금메달을 따 군대 면제를 받으면 공공연히 축하해주는 것도 현실이다.

 육군 일병 조한승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단체전 한국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딴 프로 9단의 바둑 기사다. 그의 얘기가 재미있어 한 토막 소개한다.

 남자 바둑은 한국과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라이벌이고(최근엔 오히려 중국이 한국을 앞서는 형세였다) 일본은 어느덧 2류가 됐다. 예선 리그에서 한국은 예상을 뒤엎고 중국을 4대 1로 대파한 뒤 일본과 맞붙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의 에이스라 할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이 일본 선수에게 지고 만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중국 측은 심각해졌다. 분노와 의심을 애써 감추고는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세상에 이창호·이세돌이 어떻게 한 수 아래의 일본 선수에게 진단 말인가. 이건 한국이 결승 상대로 중국이 아닌 일본을 선택하려는 준비된 시나리오가 틀림없다.”

 맞는 말이다. 중국은 버겁고 일본은 쉬우니 한국이 결승에서 일본과 만난다면 금메달은 거저먹기가 된다. 한국이 일본에 2대 3으로 져 주면 그 시나리오가 거의 완성된다. 때마침 최철한 9단과 박정환 8단은 승세가 부동인 상황이어서 모든 촉각은 조한승 9단의 판에 모아졌다. 조한승은 한국의 에이스도 아닌 만큼 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바둑이란 꼭 져주려 하지 않아도 조금만 방심하거나 마음의 끈을 살짝 풀기만 해도 지는 게임이 아닌가. 더구나 조한승은 다른 선수와 달리 이번 금메달에 ‘현역 면제’가 걸려 있었다.

 조한승 9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험한 고비가 많았으나 온 정신을 불살라 최고의 명국을 만들었고 완벽하게 승리했다. 한국이 일본을 3대 2로 꺾는 순간 중국 측의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오해는 눈 녹듯 사라지고 한때의 의심이 미안한 듯 양재호 감독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했다. 그리하여 다시 한국과 중국이 결승에서 맞붙게 됐고 이미 알려진 것처럼 한국이 4대 1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단순한 금메달이 아니었다.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참으로 멋진 금메달이었다. 한국이 만약 결승 상대로 일본을 선택했다면 우승은 쉬웠겠지만 그 금메달은 목에 걸기 어색한 금메달이 되었을 것이다. 바둑 사이트는 중국 네티즌의 항의로 도배되고 양국 감정은 극도로 나빠졌을 것이다.

 조한승 9단에게 그때 그 순간 슬쩍 지고 싶은 유혹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에이” 하며 얼굴을 붉혔다. 육군 일병 조한승이 시상대에 올라 태극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모습이 멋졌다. ‘정정당당’이란 진부한 단어가 오랜만에 달콤한 사탕처럼 입안을 맴돌았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