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아의 여론女論

체벌 금지, 100년째 시기상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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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세기 말 서당 훈장과 학동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눈에 비친 조선을 스튜디오에서 연출해 찍은 사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다. 이 사진은 1894년 발행된 조지 커즌의 『극동의 제문제(Problems of the Far East)』에도 수록되어 있고,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1894.8.18)를 통해서도 소개되었다.

1904년 한국에 건너와 개성여학교(현 호수돈여고)의 교장을 지냈던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가인 엘라수 와그너(Ellasue C. Wagner)는 자신의 책에서 한국의 전통 교육기관인 서당의 낯선 풍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서당에서는 훈장이 “아이들에게 놀랄 만한 주의력을 불러일으키거나 또는 불행히도 잘못 발음을 한 몇몇 아이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고 있더라는 것이다(『Children of Korea』, 1911).

 그러나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외국인뿐 아니라 조선의 근대 지식인들도 교육방식이 서당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대한제국 말기부터 법률가로 활동했던 유동작(柳東作)은 근대적 교육의 세 요건으로 지육·덕육·체육을 들면서 덕육의 방법으로 “어릴 때부터 아동의 양심에 비추어 명예를 중히 하고 치욕을 싫어할 이유를 설유(說諭)하여 그 덕성을 기를 것이요, 교사 혹은 양친되는 자는 엄위(嚴威)를 주로 하여 압제를 쓰거나 편달(鞭撻)을 가하여 굴복하게 만들지 말고 사부(師父)의 자애와 도리를 보여주어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교육부’, 『서우』, 1906.12).

 그리고 『황성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유근(柳瑾)도 해외의 교육학 이론을 소개하며 무조건 편달이나 금고(禁錮)의 방식으로 엄벌에 처하는 것이 효과가 없으므로,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의 병으로 보고 그 원인을 찾아 치료하는 ‘교육적 병리학’이 필요함을 지적하였다(유근, ‘교육학원리’, 『대한자강회월보』, 1907.4).

 또한 진명여학교 교사 등을 지낸 교육가 구자학(具滋鶴)도 체벌과 같은 엄혹(嚴酷)한 수단을 쓰면 학생들의 반발심만 커진다면서, 일본과 미국이 학교령에 체벌을 엄금하고 있는 사례를 들며 조선도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구자학, ‘교육시폐(敎育時弊)’. 『대한흥학보』, 1910.4). 즉 학생들에게 강압적인 체벌을 가하는 대신, 말로 타이르고 자애와 도리로 가르치며, 비행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근대적 교육의 방향이었던 것이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의 학생 체벌 금지 조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있다. 궁극적으로 체벌이 없어져야 한다는 이상(理想)에는 동의하지만 아직 체벌 금지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한국 교육계의 현실상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것이 반대론자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이미 백여 년 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체벌 금지를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 대안을 찾는 데 나태했던 교육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체가 반성해야 할 문제는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