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방송심의를 생각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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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심의'라는 이름의 검열이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한 지 벌써 삼년이 넘었다. 음반에 관한 경우 공윤의 직권에 의한 사후심의라는 단서조항이 꺼림칙한 혹처럼 붙어 있긴 했지만 아직 사후 제재의 사례는 조PD의 1집 때 일어난 미성년자 판매금지 처분말고는 다행스럽게도(!) 발생하지 않았다.

좀 이르다면 이른 판단이긴 하지만, 사전심의가 없어지면 이 땅의 대중음악계가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허망한 관측들은 역시 기우에 불과했다. 참으로 싱겁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 이래 근 60여년간 이 땅의 대중음악가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족쇄에 채우고 권력자들의 비위에 굽신거려야 했던 치욕의 기억들이 어두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것 말고는 말이다.

국가기관에 의한 검열이 폐지된 직후 주류 대중음악계에선 김민종의 〈귀천도애〉를 비롯한 일련의 표절 파문의 홍역을 앓는 동안 공윤 시절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다양한 표현과 주장들을 담은 비주류 음악들이 풍부하게 쏟아진 것이 가장 알찬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본격적인 클럽 마이너 레이블 시대를 열어젖힌 펑크 클럽 드럭의 두 밴드 크라잉 너트와 옐로우 키친의 조인트 앨범, 한국 아트록의 신기원을 아로새기는 조윤의 앨범, 얼터너티브의 피상적인 붐 속에서 록의 본질을 파고 든 노이즈가든의 데뷔 앨범, 그리고 80년대 노래운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이스크라와 메이데이의 앨범, 속물적인 가치관을 한편으론 유쾌하게 한편으론 섬찍하게 해부한 황신혜밴드나 어어부 프로젝트의 앨범 - 아마도 이들 중 많은 부분은 '대중가요 가사 부적합'이나 '시의에 적절치 않음' 혹은 외람되게도 '가사 미숙'의 판정을 받아 아예 발표조차 되지 못하거나 대폭 수정되어 걸레가 되어버린 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 앨범 속에는 원색적인 욕도 있으며 비속어를 고용한 경우도 있다. 그런 노래는 당연히(?) 방송의 제재를 받았고 앞으로도 또 받겠지만 아무리 다수의 눈에(주로 어른들의 관점에) 그것이 못마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할 기회 자체가 박탈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땅의 교사와 부모를 직설적으로 공격했다는 죄명으로 방송금지 처분을 받은 패닉의 두 노래 〈벌레〉와 〈마마〉는 이들의 대중적인 명성만큼 화제가 되었고 황신혜 밴드의 데뷔 앨범은 거의 전곡이 방송불가 처분을 받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다. 랩 음악계 또한 크고 작은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메이저 뮤지션의 경우 방송용 클린 버젼을 다시 녹음하는 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물론 이들 노래가 현재의 풍토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공급되는 방송 네트워크를 탄다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렵고 또 이들 자신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방송심의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윤의 사전심의가 무력화한 지금 방송시므이는 대중음악 작품을 거르는 유일한 여과장치이다. 그러나 거개의 대중들은 화제가 되어 기사화되는 몇몇 경우말고는 어떤 기준으로 어떤 노래가 방송국 자체 심의에 걸렸는지 잘 알지 못한다. 방송에 나오지 않는 노래가 심의에 걸려서인지 인기가 없어서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엄중한 사회적 책임을 가진 방송의 자율적인 심의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일종의 옥상옥 격인 방송국 심의실의 일방적인 판단보다는 직접적인 프로그램 담당자인 현장 PD의 양식과 다채로운 입장이 보다 적극적이며 현실적으로 반영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대중음악의 방송 심의 자체가 각 PD들의 자율에 맡겨지고 사후에 평가되는, 보다 확대된 지평을 획득하기를 희망한다. 이해집단에서 다소의 이의를 제기하는 잡음이 일더라도 우리는 방송에서 좀 더 우리 사회의 어둡고 모순된 요소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음악을 수용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음악인들 또한 방송의 권력이 아무리 무소불위라 하여도 자신의 표현이 제제받는 것에 대해 안달하고 눈치보지 말고 좀 더 의연해질 필요가 있다. 이 태도야말로 방송의 일방적인 대중음악 지배 사슬을 해체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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