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적고 깊은 맛, 그늘에 두고 익혀 먹는 재미는 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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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10면

드디어 기다리던 감이 배달되어 왔다. 이번에는 특별히 주문한 저농약 감이다. 대부분의 과일은 농약을 치지 않고 키우기가 힘이 든다. 완전한 무농약 농산물이나 유기농 농산물로 키울 수 있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사과나 감 같은 가을의 대표적인 과일들은 대부분 무농약이 아닌 저농약 수준에 머문다. 나도 시골에 가자마자 사과와 배나무 묘목을 한 그루씩 심었는데, 농약을 하나도 치지 않으니 꼴이 가관이었다. 사과나무는 어찌나 벌레가 극성인지 8월쯤 되자 이파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배는 3년을 못 가서 바이러스로 잎에 노란 반점이 생기면서 말라 버렸다. 무농약이든 저농약이든 친환경적으로 과일을 키워내는 사람들은 존경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6> 가을이 깊어갈수록 말랑말랑 한 대봉 감

나는 해마다 감을 한두 상자 정도 사먹는다. 남편이 감 먹어치우는 귀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말랑한 연시를 좋아해 납작하고 자잘한 연시는 앉은자리에서 너덧 개씩 먹는다. 그래서 아예 감을 수확하는 시기에 한 상자를 사놓고 먹는 것이다. 시중에 팔리는 감은 대개 몇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말랑하게 숙성시켜서 먹는 연시 계통의 감, 딱딱한 상태로 먹는 단감, 그리고 숙성하기도 하고 말리기도 해서 먹는 땡감 정도를 구분하면 소비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연시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납작한 연시다. 가을이 되자마자 나오는 이 감이 가장 유혹적이다. “이제 가을이 왔어요. 가을 과일의 계절이에요” 하고 노래 부르는 것 같다. 값도 그리 비싸지 않아서 새색시 시절에는 참 많이도 사다 먹었다. 하도 말랑해서 손으로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운 이 연시는 쭉 빨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많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며 먹거리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수록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바로 카바이드라 불리는 연화제 때문이다. 즉 이 연시는 나무에서 딱딱한 상태의 감을 따서, 박스 포장을 할 때 연화제를 함께 넣어 숙성시키는 것이다. 카바이드는 값이 쌀뿐 아니라 종이에 소량만 싸서 포장하는 상자 바닥에 던져 놓으면 되니 쓰기도 편하다. 2008년 모 방송에서 카바이드 가스가 연시 표면에 묻어 유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 방송되고 ‘청도반시’로 유명한 청도 감 생산농가에서 난리가 났다. 그 결과 다음해부터는 다소 포장에 불편하더라도 몸에 무해한 대체 연화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하고, 집집마다 남은 카바이드를 모두 땅에 묻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다. 역시 소비자가 살아 있어야 상황이 개선된다.

카바이드가 무서워서 납작한 연시가 나올 때 꾹 참고 있다가 사먹었던 것이 대봉이라 불리는 뾰족하고 큰 감이다. 이것은 11월 늦가을이 되어야 수확해서 겨우내 먹는 감인데, 납작한 연시에 비해 값이 다소 비싸다. 맛은 물이 적고 끈적하며 깊은 맛이 있다. 나는 납작한 연시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이 대봉 감을 더 좋아한다. 대봉은 흔히 자연시라고도 불릴 정도로 상온에서 자연스럽게 숙성하는 감을 일컫는다.

그래서 자주 사먹었는데, 아뿔싸, 그것도 못 믿을 일이었다. 어느 해인가 도매시장에서 대봉 감을 고르면서, 천천히 두고 먹으려 하니 딱딱한 감으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상인이 점원에게 “얘, 저기 딱딱한 거 한 박스, 카바이드 빼고 드려!” 하는 게 아닌가. 즉 생산지에서는 카바이드를 안 넣고 출하를 해도, 도매시장에서 카바이드를 넣는 것이다. 말랑한 감을 찾는 손님이 많으니 아예 모든 상자에 카바이드를 넣어놓은 것이다. 도매시장 어디서든 카바이드는 쉽게 구입할 수 있단다. 그러니 소매점에서도 카바이드 넣은 대봉 감이 없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정말, 건강한 식품을 구입하는 일은 참으로 까다롭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대봉이 나올 때에 딱딱한 대봉 감 한 박스를 “카바이드 안 넣은 거요!”를 외치고 사온다. 그러고는 시원한 곳에 두고 말랑해지는 것부터 차례대로 골라 먹는다. 같은 박스에 든 것도 먼저 무르는 것들이 있어 그것부터 따뜻한 방 안에 들여 놓으면 빨리 물러진다. 주황색 감은 무르면서 진한 주홍색으로 변한다. 엔간히 물렀을 때 랩에 싸서 냉동실에 넣어두면 다음해 여름에 별미 간식이 된다.

가장 다루기 힘든 감이 땡감이다. 그래서 이 감이 가장 값이 싸지만, 먹기까지 손이 많이 가므로 일반 시장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땡감은 아주 동그랗고 크기가 작다. 대봉 감은 그대로 상온에 두면 말랑해지면서 떫은맛이 사라지지만, 땡감은 워낙 떫은맛이 강해서 그 정도로는 부족하고, 자칫 썩어버린다. 그래서 따끈한 물이나 알코올 같은 것을 이용해 빠르게 숙성시키면서 떫은맛을 제거하는데, 이런 감을 물에 담근다는 의미로 침시(沈枾)라고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깎아 말려 곶감을 만들어야 먹을 수 있다. 햇볕에 마르면서 타닌의 떫은맛이 천천히 빠지고 단맛이 강화되는 것이다. 어쨌든 도시의 일반 가정에서는 이런 감은 다루기가 힘드니 시골의 오일장 같은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나는 그 몹쓸 호기심 때문에 땡감을 사다가 침시를 만들어보려 한 적이 있다. 물론 이천 시골집에 살던 때의 일이다. 사람들에게 들은 대로 꼭지를 따고 강한 소주에 담갔다가 밀폐된 용기에 넣어두었는데, 맛있는 침시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나머지 감은 깎아서 말리기로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까치가 문제였다. 내가 묘목을 사다 심어 10년 만에 달린 단감 하나를 날름 쪼아 먹은 게 얄미운 까치였는데, 이런 까치가 말랑하게 말라가는 곶감을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어떤 것은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역시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 후부터는 시장에 나온 땡감이 아무리 예뻐도 눈길을 주지 않기로 했다.

집에 배달되어 온 저농약 대봉 감을 받자마자 상자를 뜯어 모든 감을 꺼냈다. 상처가 나거나 무르기 시작한 네 개를 먼저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두고, 나머지는 쟁반에 늘어놓아 그늘에 두었다. 햐얀 접시에 놓인 감이 어찌나 고운지 ‘반중(盤中) 조홍감이 좋아도 보이나다’로 시작하는 박인로의 시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다. 밥 먹을 때마다 어느 감이 먼저 무를까 요리조리 살피는 남편의 진지하고도 행복한 표정이, 감나무에 앉아 어느 감을 먼저 먹을까 고르는 까치 표정과 겹쳐져 웃음이 나온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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