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 땅에 이름 붙여주고, 가슴속 응어리 풀어줬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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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자메이카 세인트엘리자베스주에서 대한지적공사 직원들이 현지 측량사와 함께 측량작업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지 측량사 로웨 로얀, 지적공사 고문성 대리, 현지 홍보담당자 맬컴 조이, 지적공사 윤정환 과장. [대한지적공사 제공]

한국의 일상적인 제도가 다른 나라에 가면 놀라운 ‘창조’가 될 때가 종종 있다. 부동산 등기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상화했지만 중미의 섬나라 자메이카에선 다르다. 땅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등록이 안 돼 있다. 그러니 ‘내 땅’이라도 ‘내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유령 같은 땅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 넣는 존재가 있다. 대한지적공사라는 한국의 공공기관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淮水橘化爲枳)’. 사람이든 물건이든 환경이 바뀌면 성질이나 가치가 변한다는 말이다. 지적(地籍)공사는 태평양을 건너가 탱자를 귤로 만들었다. 자메이카에서 이름(등기) 없는 땅에 이름을 붙였다. 그랬더니 노예제도로 응어리진 한(恨)도 풀어졌다. 작은 창조 같지만 자메이카 국민에게 적잖은 감동을 선사했다.

토지등기가 감동을 선사하는 사업

‘우사인 볼트, 레게, 블루마운틴 커피 … .’

 지구 반대편 카리브해 북부의 자메이카를 유명하게 만든 것들이다. 햇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이다. 숨기고 싶어 하는 것도 있다. 식민지 시절 노예 집결지였다는 점이다. 자메이카는 1830년대 노예제도가 폐지되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1962년 영국 연방 내 독립국으로 인정받으면서 노예의 후손들이 나라를 세웠다.

 영국 지배 아래서 노예들은 주인의 땅을 경작했다. 내 땅을 갖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해방 이후에도 노예 시절 그랬듯이 농사를 지었지만 땅 주인 행세를 하지 못했다. 정식 등기를 한 땅이 아니어서 소유권 행사가 불가능했다. 정부는 그런 땅에 세금을 부과했다. 땅으로 인한 납세의무가 있는데 소유권은 없는 억울한 상태는 지속됐다. 지금도 자메이카의 토지등기율은 30%에 불과하다.

 이 나라 농민들에게 토지등기는 노예 선조들의 경작지 소유권을 후대에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토지등기는 노예해방처럼 가슴 벅찬 일이다. 평생 농사를 지은 키슬린 굴번(60·여)은 토지등기등본을 받으면서 “평생 소원을 이뤘다”며 흐느꼈다고 한다.

  이 나라 세인트엘리자베스주에서는 지난 7월부터 시작된 토지등기사업으로 2년간 총 1만2500필지의 땅에 주인 이름을 붙여줄 예정이다. 15년 이상 땅을 점유한 것이 인정되면 소유주가 된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기자가 찾아간 이 주의 샌타크루즈. 자메이카 정부가 토지등기사업의 시범지구로 정한 곳이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 측량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흑인 측량사가 토털스테이션이라는 측량기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50여 m 떨어진 곳에 측량보조원이 흰색과 빨간색으로 이뤄진 막대를 들고 서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지적공사에서 파견된 고문성 대리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이용해 측량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국제경쟁력 갖춘 한국의 지적 서비스

측량 시작 후 10분쯤 지나자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신기한 구경을 하는 분위기였다가 토지등기의 의미를 설명해 주자 자기 경작지는 언제쯤 등기가 가능한지 앞다퉈 묻느라고 어수선해졌다. 개인적으로 등기가 가능하지만 문제는 비용이다. 개인이 전문가를 고용해 등기 절차를 진행하면 필지당 3000달러(330만원)쯤 든다. 하지만 지적공사를 통하면 7분의1 수준인 400달러만 내면 된다. 지적공사의 요금이 싼 이유는 뛰어난 기술력 때문이다. 공사는 GPS와 전산 측량시스템을 활용해 소요 인력을 3분의 1로 줄였다. 작업시간도 빠르다. 이미 라오스·베트남·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 토지 등기사업을 한 노하우가 있다. 한국의 지적 관련 기술력은 호주·뉴질랜드·스웨덴·네덜란드와 함께 세계 5대 강국으로 꼽힌다.

 자메이카 정부는 세인트 엘리자베스 주의 토지등록 업무를 모두 지적공사에 맡겼다. 500만 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공사 입장에서 큰돈은 아니지만 중남미 진출의 교두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공사의 최원준 자메이카 사무소장은 “세계측량회의에서 우리 기술력과 해외 진출 현황에 주목한 자메이카 측량사들이 귀국해 한국을 추천했다”고 전했다.

 토지등기의 위력은 적잖다. 우선 은행돈 빌리기가 쉬워진다. 일부 기업농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영세농이다. 그동안 은행에서는 미등기 토지를 담보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토지등기를 하면 소유권 덕분에 담보대출이 가능하다. 토지의 매매나 상속·증여도 가능해진다. 종전에도 토지거래는 됐지만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 제값을 받지 못했다. 등기가 되면 땅마다 차이는 있지만 부동산 가치가 30% 이상 오르는 효과가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 국무부 청사에서 만난 로버트 몬테규 국무장관은 “한국은 최빈국에서 잘사는 나라로 발전한 경험이 있어 빈곤이 뭔지 잘 안다. 이런 점에서 자메이카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할 걸로 본다”고 말했다.

 지적공사는 자메이카를 시작으로 나머지 12개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로 한국의 지적 서비스 수출을 확대할 방침이다. 공사 자메이카 사무소의 윤정환 과장은 “자메이카를 비롯해 카리브해 국가에선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아직 많다. 비즈니스 외교사절로 한국의 기술과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킹스턴(자메이카)=권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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