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들, 칠레 광부들을 배워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91호 31면

추위가 유난히 빨리 찾아온 가을, 나는 두 개의 탈출기 앞에서 세상을 사는 양식을 생각한다. 하나는 칠레 광부들의 매몰 광산 탈출기, 다른 하나는 너무도 비극적인, 그러나 단순한 사건 기사로 흘려버린 친부 살해 또는 가정 탈출기. 두 개의 상반된 스토리는 인간에게 내장된 능력, 혹은 삶의 암벽을 뚫는 드릴이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세상사의 드라마를 리얼하게 대비시킨다.

700m 지하라면 그곳은 현실과 유리된 죽음의 무대다. 극한 상황이 따로 없을 것이다. 윤리·도덕은 사라지고 생존을 향한 동물적 본능이 발현되기 시작한다. 그곳엔 빛이 없다. 암흑 속에서는 옆 동료의 숨소리·신음소리·발소리도 공포로 다가온다. 칠레 광부 33인이 지하에서 67일간 버티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기 전 맺었다는 ‘침묵의 언약’으로 미뤄 차마 말하지 못할 흉사가 있을 수도 있다. 출구 없는 곳에 갇힌 세 사람의 이야기인 사르트르의 희곡 ‘노 엑시트(No Exit)’가 시사하듯 그곳에서 ‘지옥은 바로 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칠레 광부 33인은 ‘타인의 지옥’을 ‘우리의 희망’으로 바꿨다는 사실이다. 연장자인 고메스와 작업반장 우르수아는 ‘생존’이라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각자의 기질에 맞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들은 인간 감정의 최고 승화지인 신(神)을 붙들었고, 스스로도 이타적인 말과 행동으로 실의에 빠진 동료들을 감화시켰다. 극한적인 광산 탈출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고, 전 세계를 열광시켰다.

한편 친부 살해는 지상의 작은 감옥, 억압적인 아버지가 전제군주처럼 군림하는 그 가정을 탈출하는 방법이었다. 그 소년에게는 말이다. 소년은 춤추고 노래하며 살고 싶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판검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슈퍼스타K 2’에 출현했던 동갑내기 아이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로 젊은 열정을 선율에 실어 뿜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청춘의 자유로운 비상을 막무가내로 막아섰다. 날개를 아예 분질러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버지는 나를 윽박지르며 못살게 굴어. 아버지가 없어지면 좋겠어.” 그 소년은 작은 감옥에서의 탈출을 그런 방식으로 기획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죽이고선 자신도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게 비극이었다. 아들의 감정을 잔인하게 매몰시킨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은 인간의 감정이 제거된 프랑켄슈타인의 자기방어적 파괴였다.

희극과 비극이 엇갈린 이 두 개의 탈출기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 불황의 감옥에 갇힌 우리에게 뭔가 비장한 말을 걸어온다. 불사조란 뜻의 ‘피닉스’ 캡슐을 타고 생환한 광부들의 환한 웃음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인류의 웃음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도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경제위기, 심화되는 빈부 격차, 끊임없는 전쟁과 테러, 그리고 지구를 휩쓰는 환경위기의 깊은 감옥에서 우리를 건져 낼 피닉스호는 언제, 어떻게 도착할 것인지 애타게 갈망한다. 공포와 절망의 숨소리를 희망의 웃음으로 바꿀 출구는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친부 살해의 소년처럼 인류는 비극적 선택으로 내몰릴 것인가?

2주 전 경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는 이런 고민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선사하는 일종의 피닉스호 같아 보였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 세계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바탕으로 중국에는 환율 양보를, 미국과 유럽연합(EU)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쿼터 양보를 이끌어 낸 것이다. 선진국 모임에 뒤늦게 합류한 중진국임에도 한국은 좌장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노련한 우르수아의 지혜를 상기시키는 한국의 개가는, 계산기만 두드려서는 나올 수 없는 ‘상생’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감정에 호소한 결과이리라.

2001년 9·11 테러와 2008년 금융위기는 우리가 지난 세기에 배우고 따르려 했던 ‘선진’이라는 표상을 여지없이 우그러뜨렸다. 그것은 모래밭 위의 화려한 성(城), 남의 희생을 딛고 선 위선의 탑(塔)이었던가를 자문하게 만든다. 문명과 야만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이 위태로운 사실을 부자 나라들에 다시 알려 준다면, 제로섬 게임의 세계사적 운명을 바꿔 줄 탈출 드라마는 가능할 것인가? 이번 주 서울에 모이는 G20 정상들이 21세기의 지구촌에 동반 탈출의 계획서를 만들어 낼지 지켜보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