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대통령의 입' 9년] 32. 유신 반대 공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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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하기 얼마 전의 김일성 북한 주석.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10월 유신을 매우 경계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조총련계 청년의 분풀이 사격에 의해 서거하기 약 4개월 전에 대남공작 담당요원들과의 담화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비밀교시를 내렸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들고 나온 것은 곧 장기집권하겠다는 속셈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유신체제가 굳어지면 남조선 혁명이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유신체제가 더 굳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신헌법을 백지화시켜야 한다. 그러자면 유신헌법 반대투쟁이 더 격렬하게 일어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정 안되면 박정희를 아예 없애버리는 공작도 해볼 필요가 있다."

끔찍하게 들리는 이 말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 북한 정권이 끈질기게 추진해 온 대남혁명 목표를 단적으로 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시대착오적이었다. 자신들이야말로 남반부를 주체사상으로 통일시킬 혁명기지라고 노동당 규약에 명문화해놓고 공개적으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파괴공작을 전개해 온 것이다.

북한은 남북대화를 이용해 정치선전을 퍼부으면 남한체제가 약화될 것으로 보았으나 오히려 박 대통령이 10월 유신으로 체제를 강화하자 남북대화에서 슬슬 발을 빼기 시작했다. 북한의 이러한 변화는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 화려하게 부상하려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전략에도 차질을 가져왔다.

그 무렵 이 부장은 명실공히 제2인자의 지위를 굳히는 듯이 보였으나 과잉행동으로 잇달아 견제를 당하기도 했다. 그가 한때 중정부장실을 광화문에 있는 종합청사 맨 위층으로 옮겼던 일이 있었다.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 안에 있는 총리실을 밑으로 내려다 보는 위치여서 제법 위압적인 인상을 줄 수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박 대통령은 크게 힐책하고 원위치로 돌려보냈다. "정보부라는 기구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일해야 하는 조직인데 어쩌자고 사람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종합청사의 맨 꼭대기 층에 들어가 있느냐."

또 다른 사건은 지금 삼청동 언덕배기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 건물과 관련된 것이다. 이곳 대지는 중앙학원의 소유였는데, 정보부는 부장 관저를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박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서울 상공을 지나다가 공사 현장을 목격하고 조사를 시킨 결과 중정 건물 공사장임이 확인되었다. 당황한 중정 당국이 내부설계를 갑작스레 사무실 용도로 변경하는 바람에 건물은 지금 보는 바와 같은 기형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 부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73년 6월 서울에서 제3차 남북조절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는 태연함을 보였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거의 파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북한 노동당은 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될 때 동독 공산당에게 남쪽은 머지않아 자기들의 선전공세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상황이 정반대로 굴러가자 북한은 남북대화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와 비례하여 이 부장의 2인자 지위도 무너져내리는 듯이 보였다.

김성진 전 청와대 대변인·문공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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