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사원들이 민족 반역자로 몰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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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2009년 3월 17일 북한에 억류됐다 140여 일 만에 풀려난 한국 출신 유나 리가 그해 8월 5일 LA 버뱅크 지역의 밥 호프 공항에 도착해 남편 마이클 살다테, 딸 하나와 포옹하고 있다. [중앙포토]

“분명히 중국 국경 안에 있었는데 북한군에게 끌려 갔다. 수감 중엔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수면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해 3월 중국·북한 국경 지대에서 탈북자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다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계 미국인 유나 리(38·사진). 석방 14개월이 지났지만 그는 체포 당시의 상황과 140여 일의 악몽 같은 북한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본지가 한국 언론 최초로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그간 칩거 생활을 했다.

 “좁은 곳에 혼자 있으면 갇혀 있던 곳 생각이 났다. 많이 우울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1년쯤 지나서야 괜찮아졌다.”

 -잡힐 때의 상황과 억류 생활은.

 “9일간의 촬영 일정 중에 8일째였다. 안내원이 인신매매 경로를 보여 주겠다며 계속 북한 쪽으로 안내했다. 결국 북한쪽 두만강둑을 밟게 됐는데, ‘위험하다’는 생각에 중국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강 중간쯤 왔을 때 총을 든 북한 군인 두 명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달아나 중국 강변으로 나왔는데 동행한 로라 링(중국계) 기자가 다리를 다쳐 못 움직이게 됐다. 분명히 중국 국경 안에 있었는데 북한군이 와서 끌고 갔다.”

 -공포가 컸겠다.

 “국경 부근 감옥의 독방에 나흘 정도 있었는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잠도 이루지 못했다. 유일한 위안은 감옥에서 장작을 땔 때 나는 냄새였다. 옛날 할머니가 장작을 때실 때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평양으로 압송될 땐 북한 군인이 산기슭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바깥 바람을 쐬라’고 했는데 ‘내리면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릴 수 없었다.”

 -평양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한국 출신이라고 조사원들이 나를 더 미워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았다. 억류된 지 두 달쯤 지나 가족과 통화를 시켜줬는데 딸에게 ‘출장왔다’고 둘러댔다. 전화를 끊고 얼마나 울었는지….”

 -못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했나.

 “북한 재판소에서 12년 노동교화형을 받고 항소를 하려 했는데, 재판은 한 번으로 끝이더라. 그땐 정말 절망적이었다.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정말 죽을 결심까지 했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까 수면제를 줬는데, 그걸 모았다. 어느 날 ‘내가 죽으면 가족들은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에 수면제를 한꺼번에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30분 뒤 남편이 보낸 소포를 받게 됐다. 안에 노트와 함께 ‘지금 일을 잘 기록해 뒀다가 나중에 웃으면서 회상하자’는 편지가 있었다. 그 소포 덕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됐다.”

 -LA 버뱅크 공항에 내릴 때 상황은.

 “비행기가 착륙하자 우리를 데려온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조종석으로 데리고 가 바깥을 보게 해줬다. 딸과 남편 모습을 보고 엉엉 울었다. 원래 로라가 먼저 내리기로 돼 있었는데 ‘언니가 먼저 내리라’고 하더라.”

 -힘든 경험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 것 같나.

 “가족의 소중함을 절절히 느꼈다. 감옥에 있을 때 꿈을 하나 꿨다. 노래자랑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데 중간에 가사를 잊어버렸다. 망신스러워 죽겠는데 딸이 무대로 올라왔다. 둘이 손잡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남편은 아래서 손뼉치고. 꿈에서 깨어나 희망을 봤다. 지금도 그 마음이다.”

로스앤젤레스=미주중앙일보 천문권·부소현 기자

◆유나 리=한국에서 태어났다. 1996년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2005년부터 올해 초까지 커런트TV에서 일했다. 다큐멘터리 ‘비상구로의 탈출(가제)’를 제작하던 중 북한에 억류됐다가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의 방북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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