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건립에 앞장 선 미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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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스티브 카발로(오른쪽)가 자신이 디자인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뒤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사람은 카발로의 일을 돕고 있는 한유빈씨.

미국의 대표적인 한인타운인 뉴저지주 팰리세이드파크시가 23일(현지시간) 일본군 위안부를 추모하는 기림비를 세웠다. 미주 한인의 권리신장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인유권자센터(KAVC)와 지역 주민이 시작한 건립 노력이 1년 5개월 만에 열매를 맺었다. 서구 국가에서 일본군 위안부 추모비가 지방정부 승인 하에 세워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로·세로 약 1미터 크기의 대리석 기림비에는 “1930년대부터 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유린당한 20여만 명의 여성과 소녀를 기린다”며 “위안부로 알려진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인권 침해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는 인류에 대한 이 잔혹한 범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적시했다.

 기림비엔 일본군에 의해 학대받고 있는 위안부의 모습도 새겨졌다. 디자인은 팰리세이드파크 도서관 책임 사서 스티브 카발로가 맡았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91년 한국인 친구로부터 처음 위안부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엔 “설마”하며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책과 신문을 통해 일본군의 만행을 확인하면서 그는 위안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 11년 전 한국인과 결혼한 뒤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2008년 9월엔 서울의 위안부 쉼터를 직접 찾아갔다. 할머니들과 일주일을 머물며 위안부 규탄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다.

 2009년 여름 그는 도서관 근처에서 서명운동을 벌이는 10대 한인 학생들과 만났다. KAVC에서 여름방학 인턴을 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한인 유권자를 찾아다니며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의 노력에 마음이 움직인 카발로는 선뜻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다.

 위안부를 위한 ‘나눔의 집’ 모금을 위해 도서관을 빌려준 것은 물론 자신과 동료 화가의 작품까지 내놨다. 기림비 디자인도 그가 손수 작업했다. 도서관 책임자인 그는 팰리세이드파크 시정부 설득에도 발벗고 나섰다. 한인 사회는 물론 카발로와 같은 백인 원군까지 나서자 제임스 로툰도 팰리세이드파크 시장도 기림비 건립을 도왔다. 애초 “한인들의 문제이니 한인 교회에나 세우라”는 반대 목소리가 강했던 시의회도 결국 기림비 건립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카발로는 “독일 나치 치하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잊지 않기 위해 유대인은 미국 곳곳에 기념비를 세웠다”며 “일본군 만행을 증언해줄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을 때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기림비를 건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로툰도 시장을 비롯해 시의회 및 도서관 관계자와 교민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KAVC 김동찬 소장은 “2007년 미주 한인들의 풀뿌리 힘으로 연방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이끌어냈지만 일본이 이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해 이 이슈가 잊힐 뻔했다”며 “앞으로 뉴욕시 플러싱과 로스앤젤레스시 오렌지카운티를 비롯한 미국 내 20여 곳으로 기림비 건립을 확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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