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2. 안과 바깥 <10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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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는 손을 뻗쳐서 벽구멍 속의 전등을 껐다. 옆 방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어둡게 불은 끄구 지랄이야. 언니야, 그 꼬마 초짜란다.

- 알어 이년아!

이쪽도 쿡쿡 웃더니 대뜸 내 속옷을 벗겨 내렸다.

- 떨지 말구. 그냥 올라오면 되는 거야.

아, 금방 끝났다. 여자는 나를 밀쳐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나는 불 꺼진 방에 혼자 누워서 숨이 고르게 변해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뭐야, 아무 것두 아니잖아. 내 안에서 자라나고 번성했던 무엇인가 거대한 것들이 눈사태처럼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술에서 깰 때처럼 지겨운 구역질과 자기 혐오감이 들었다. 해맑은 이마, 쏘는 듯한 눈빛, 원피스 자락 아래로 보이던 계집아이들의 무릎, 또는 이른 아침에 눈부시게 흰 칼라를 달고 등교하는 여학생들의 나풀대는 단발머리와 발목까지 올라온 흰 양말과 그 위로 날렵한 종아리들, 버스 안에서 차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앞에 선 여학생의 뺨 위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뽀얗게 보이던 솜털들. 사실 우리가 말은 제법 냉정하게 사나이처럼 지껄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상득이는 이미 위 학년의 여학생을 좋아하다가 음독하고는 겨우 살아난 처지였고 또 누구는 벌써 몇 년째 첼로를 끼고 다니던 여학생네 집 앞을 서성거렸다. 물론 우리 가까운 또래들은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 서로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성진이와 나는 야행열차를 탔다. 서두른 탓이었는지 다행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통행금지가 시작된 텅빈 도심지가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남원 인월리 부근의 산골짜기에는 그의 외종형뻘 되는 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이 또한 기인이었다. 낡은 법률서적 여러 권이 책상 앞에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시 공부로 세월깨나 죽이다가 생각을 바꾼 꼴이 틀림없어 보였다. 장가도 들지 않고 혼자서 흙벽돌을 찍어 산막을 짓고 벌통을 처음에는 서너 통 분양해 들어와서는 삼십 통으로 늘렸고 닭도 백여 마리에 젖을 내는 염소도 다섯 마리, 땅은 밭이 이천평 되었지만 일손이 없어서 절반을 관리하는 데도 쩔쩔매고 있었다. 그는 집 뒤의 산자락을 손가락질하면서 저 야산 전부가 개간할 수 있는 자기네 땅인데 삼만여 평 된다고 했다. 사람들이 앞날을 몰라서 그렇지 과수원으로 개간만 한다면 금덩어리라는 거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성진이나 나나 그저 무덤덤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서 뭘 할 건데 하며 되묻고 있었다. 나와 성진이는 이튿날부터 버려 두었던 나머지 밭을 일구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오백여 평의 땅을 뒤집어 엎는 일도 보통 노역이 아니었다. 그때에는 경운기 따위도 없었고 밭 가는 소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둘이서 며칠 동안 삽으로 파헤쳤는데 고작 이백여 평 남짓 되었다. 짐짓 모른 체하고 있던 형이 아랫동네에 내려가 삯을 주고 소를 빌려다가 나머지 부분을 갈아 엎었다. 우리는 거기다가 겨울 김장배추와 무 등속을 파종했다. 한여름의 중간에 겨울 김장 작물을 심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어쩐지 세월을 앞당겨 사는 것 같아 서운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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