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6) 불을 뿜는 2군단 야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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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아군의 4.5인치 로켓포가 적진을 향해 불을 뿜고 있다. 국군 2군단은 52년 5월 금성 돌출부 너머의 중공군을 향해 2만 발의 포탄을 발사해 막대한 타격을 입힘으로써 그들이 53년 중반까지 전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저녁 무렵이었다. 국군 2군단 예하의 모든 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155㎜와 105㎜ 야포는 물론, 예하 각 사단의 보병부대가 보유한 4.2인치 박격포도 금성 돌출부 저 너머의 적을 향해 함께 거센 포격을 가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의 포격은 밤새 이어졌다. 내가 있던 2군단 사령부는 금성천과 가까웠다. 나는 사령부 집무실 안에서 금성천 변에 일렬로 늘어선 5포병단의 포가 굉음을 내면서 포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포들은 잠시 쉴 틈도 없이 줄곧 거센 불줄기를 뿜어내며 포탄을 적진으로 날려 보냈다.

 군단의 모든 포는 어림잡아 180문 이상이었다. 군단 야포의 대부분은 5포병단 사령부가 있던 금성천 변에 몰려 있었고, 나머지 포는 사단 예하의 포병대대가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군단의 포병은 다소 흩어져 있기는 했으나 야포들은 일사불란하게 포격을 가했다. 모든 포가 5포병단 메이요 대령의 지휘 아래 엄격한 통제를 받으며 포격을 했기 때문이다. 포병들은 미리 깔아둔 포병 통신망을 통해 그의 지시를 받아 순차적으로 포격을 가했다. 우리가 착탄 지점으로 상정한 곳은 아주 많았다. 적의 보병 병력이 모여 있다고 판단한 지역, 적의 보급물자가 쌓여 있을 것이라고 관측한 곳, 아울러 적이 공격을 할 경우 가장 먼저 가동할 것이라고 생각한 포병 진지 등을 골고루 포격했다.

 밤새껏 진행한 포격으로 2군단은 전체 2만 발이 넘는 포탄을 적진으로 날렸다. 나는 그날 밤 11시에 취침해 아침 5시쯤에 일어났다. 포성은 내가 묵던 막사 밖에서 여전히 지축을 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브리핑실에서 간밤에 있었던 포격 상황을 점검했다. 아군은 치열한 포격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열심히 전방의 관측소를 통해 적의 동향과 피해 상황 등을 체크하고 있었다.

 전선 너머의 중공군은 쥐죽은 듯 움직임이 없었다. 전방에서 새로 관측한 적 상황은 속속 내 집무실로 보고되고 있었다. 나는 전선을 시찰할 생각이었다. 어서 빨리 전선 관측소로 나아가 중공군이 어떻게 포격을 당했는지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포격은 오전 10시쯤까지 이어졌다. 나는 5포병단에서 포격을 종료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뒤 곧바로 지프에 올라타 전방 관측소로 향했다. 포병이 운영하는 관측소는 여러 곳에 있었다. 대부분 고지 중간이나 지형적으로 아주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아 저 너머의 적 동향을 관찰하기 쉬운 곳이었다. 나는 관측소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준비해 놓았던 망원경을 집어들었다.

 선명하게 내 눈앞에 떠오르는 모습은 처참함 그대로였다. 밤새껏 아군 진지로부터 날아간 포탄은 검고 푸르렀던 대지(大地) 위에 하얀 구멍을 무수히 남겼다. 포탄이 떨어진 곳은 모두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울러 그곳은 흙이 완전히 뒤집혀 있기도 했다.

 간밤에 날아간 2만 발의 포탄이 남긴 자국은 벌집 구멍처럼 보였다. 155㎜와 105㎜ 포탄의 위력은 아주 다르다. 105㎜는 사람과 장비 일부를 파괴하는 인마(人馬) 살상용이다. 그러나 155㎜는 상대의 진지(陣地) 자체를 파괴한다. 진지에 155㎜의 거대한 포탄이 떨어지면 그 안에 있던 사람은 물론 진지의 흙이 한 번 뒤집히고 만다.

 내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 모습은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힌 상태였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그 안에 적군의 시체가 있는지, 아니면 적의 어떤 시설과 물자가 타격을 받았는지는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그저 언뜻 지켜본 바로는 ‘적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하다’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나는 다시 사령부로 돌아왔다. 각 참모들이 전과(戰果)를 보고했다. 대부분 “밤새껏 퍼부은 사격의 성과가 매우 좋은 것 같다”는 분석 내용을 올렸다. 더 이상 적의 피해 상황을 체크하기는 곤란했다. 나는 답답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포격이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내가 2군단 지휘를 맡은 기간은 4개월이다. 내 후임으로는 유재흥 장군이 부임해 6개월 동안을 지휘했다. 그 뒤로 다시 2군단 지휘봉을 잡은 사람은 정일권 장군이었다. 내 뒤로 두 장군이 2군단을 지휘하는 동안 적은 거의 도발을 벌이지 못했다.

 나는 전면에 나타난 중공군에 반드시 심각한 타격을 입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국군도 막강한 화력을 운용해 저들을 일거에 초토화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점을 이 기회에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성과는 6·25전쟁 기간 동안 줄곧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던 한 단어, 즉 ‘밴플리트 탄약량’ 덕분이었다.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은 일단 적을 향한 공격이 정해지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밴플리트는 당시 미 의회에서도 “탄약 소비량이 너무 많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과감하고 담대하게 화력을 운용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탄약을 너무 많이 소진한다’는 등의 여론 동향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소신 있게 적을 몰아붙였고, 그러기 위한 화력 운용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과감했다. 그의 그런 기질 덕분에 2군단도 2만 발의 포탄을 사용해 가면서 중공군에 위력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은 의표(意表)를 찔린 셈이었다. 신설 국군 2군단을 겨냥해 서서히 병력을 몰아 한꺼번에 기습적인 작전을 벌일 수도 있었던 중공군은 거의 1년 동안 제대로 운신(運身)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작전 때문에 2군단이 맡은 25㎞의 전선은 1년여 동안 조용했다. 나는 포격이 끝난 뒤 적의 동향이 거의 없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중공군에 늘 밀리던 국군이었다. 때로는 저들과 싸워 이기기도 했지만, 군단 또는 사단급 군대가 부딪쳐 우리가 승리를 거둔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 결과가 자주 나타났다. 이제 국군에 배치된 포병의 화력으로 대규모 중공군을 맞아 단독으로 싸울 힘이 생겨난 것이다. 그 의미는 매우 컸다.

 현대전 능력을 갖춘 2군단이 새로 만들어지고, 미 포병단의 지휘 아래 신규 한국군 포병이 가세해 ‘금성 돌출부’라는 휴전선상의 아주 예민한 곳에서 중공군을 집중 포격함으로써 마침내 적의 예기(銳氣)를 꺾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2군단은 바로 유명해졌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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