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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화양극장, 어르신 전용 ‘청춘극장’으로 재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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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2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옛 화양극장 입구에 들어서자 상영관 밖으로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늴리리야~니나노. 백옥같이 고운 얼굴 햇볕에 그을리는 게 웬 말이냐.” 상영관 안으로 들어서자 통로는 물론 스크린 바로 앞의 무대까지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는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마음속 답답한 거 다 날아갑니다”라고 외치는 강사의 동작을 따라 어르신 100여 명이 어깨 위로 팔을 들어올렸다가 힘차게 던진다. 어르신들은 한바탕 율동을 끝낸 후에는 연극치료사와 함께 역할극을 시작한다. 어르신 전용 극장으로 바뀐 화양극장은 ‘노인 극장’이 아닌 ‘청춘 극장’의 모습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어르신 종합문화공간(옛 화양극장)에서 12일 어르신들이 영화 상영에 앞서 레크리에이션을 즐기고 있다. [오종택 기자]

화양극장은 서울시가 7억500만원을 투입해 어르신 종합문화공간으로 꾸미면서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됐다. 대관료는 한 달에 3000만원이다. 영화는 하루에 두 번(오전 11시, 오후 3시) 상영한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멋진 인생’ ‘황야의 결투’ 등 주로 고전 영화를 튼다. 상영시간 사이에는 연극치료·웃음치료 등 어르신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입장료 2000원을 내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월~토요일)까지 극장에서 하루 종일 놀 수 있다. 단, 만 55세 이상만 입장할 수 있다. 2일 개장한 후 하루에 200여 명의 어르신이 극장을 찾고 있다.

‘어르신 놀이터’에서 일하는 이도 어르신이다. 오전·오후반으로 나눠 24명의 어르신이 근무한다. 월급은 45만원(종일반 90만원)이다. 막내는 극장 내 ‘어르신 상담센터’의 박연순(52) 사회복지사다. 극장에 온 어르신들의 고민상담을 하는 박씨는 평균 연령대(60대 중반)보다 한참 어려 극장의 마스코트로 불린다. 가장 인기 있는 콤비도 있다. 극장 내 ‘청춘 카페’의 마담 역할을 하는 백봉현(72)·신창호(71)씨다.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차·팝콘을 만들고 나르는 일을 맡았다. 백씨는 “처음에 역할 분담을 할 때 남자인데 왜 팝콘이랑 커피를 맡아야 하느냐며 항의도 했지만 이제는 일하는 게 신난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 들어 이렇게 일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사람들이 커피와 팝콘을 맛있게 먹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며 웃었다. 극장에서 일하는 어르신은 영화를 보러 온 어르신에게 ‘눈높이 안내’를 한다. 극장 입구부터 상영관 의자에 앉기까지 세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극장에 놀러 온 어르신이 “큰 극장 가면 젊은 사람들 눈치 보이는데 여긴 편하고 좋다”고 하자 일하는 어르신은 “노인정에서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기분”이라고 대응했다.

어르신의 애정 어린 충고도 쏟아진다. “내 생각에는 인쇄물을 만들 때도 글씨를 크게 해서 노인네들을 배려해야 해.” 민부용(67·서울 삼청동)씨의 말에 매표소 안내를 하던 안현숙(64)씨가 “맞아요. 어르신들이 전화번호 안 보인다고 막 그러더라고요”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 있던 정봉환(75·서울 홍은동)씨가 “우린 동작이 굼뜨니까 첫 장면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끝나고 나서 앞 장면만 다시 틀어주면 좋겠어”라고 거든다. 이무영 서울시 문화정책과장은 “앞으로 노인복지시설이 없는 지역을 중심으로 어르신전용문화공간을 더 만들겠다”고 말했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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