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89) 2군단의 진용을 갖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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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제트 대령은 미군 제5포병단을 창설해 새로 만드는 국군 2군단의 포병사령부로 운용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말했다. 155㎜ 야포의 6개 대대(1개 대대는 18문의 야포를 운용)와 105㎜ 야포 1개 대대를 붙여 준다는 말이다. 당시 국군은 6·25전쟁이 벌어진 뒤 너무나 뼈아프게 절감한 화력(火力)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의 도움을 받아 광주 포병학교에서 155㎜ 야포 대대 6개를 운영할 포병을 육성하고 있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55㎜ 야포를 확보해 운용하는 것은 아군 전투력 증강에 획기적인 도움을 줬다. 당시 야포로서는 세계적으로 미군의 155㎜ 야포가 성능 면에서 가장 뛰어났다. 미군이 국군 2군단에 최신예 155㎜ 야포를 100문 이상 지원한다니 한번 해볼 만했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한국군 현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첫걸음은 강력한 포병을 키우는 일이었다. 그 일환으로 광주에서 155㎜ 포병대대를 양성했다. 1기 포병지휘관 교육을 받는 장교들 가운데 박정희 대령의 모습(동그라미 안의 인물)이 보인다. 고 이경모씨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렸다.

북한군과 중공군은 대부분 소련제 122㎜ 곡사포를 운용하고 있었다. 사거리 면에서 아군의 105㎜와 비슷했다. 포병의 사격에서는 ‘대(對) 포병 사격’이 가장 중요하다. 적의 후방에서 아군의 진지를 향해 포탄을 퍼붓는 적군 포병을 향해 이쪽에서 먼저 포탄을 날려 공격하는 사격 말이다. 그래야 적의 주요 화력인 포탄이 아군의 진지를 향해 날아드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국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 155㎜ 야포를 집중적으로 지원받은 뒤 이를 실전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일이 시급했다. 광주에 포병학교를 만들어 포병 양성에 나선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한국군을 더 이른 시간 안에 강한 화력으로 중무장하기 위해서는 단기간 안에 더 많은 포병을 양성해야 했던 것이다.

2군단 창설은 이 포병들을 기본 교육 과정으로 훈련한 뒤 전선에 투입, 다시 일정 기간 동안 실전 경험을 쌓게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국군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던 셈이다. 어쨌든 미 8군의 기본 구상이 한국군 현대화 작업에 모아져 있다는 점을 안 이상 나는 제임스 밴플리트 사령관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지리산 토벌작전에 이어 2군단 창설 작업을 맡기로 했다. 머제트 대령이 다녀가고 얼마 뒤 나는 수도사단에 공비토벌 작전을 마무리하도록 남겨두고 새 임무가 기다리고 있던 춘천 동북쪽의 천전리(泉田里)로 떠났다.

내가 지프에 올라타 앞장을 서고 공병대를 비롯한 사령부 요원을 태운 트럭 50대가 뒤를 따랐다. 남원을 떠나 꽤 오랜 시간을 달려 춘천 인근의 천전리에 도착했다. 천전리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조금만 땅을 파들어 가도 물이 보였다. 천막을 세우는 데 상당한 애로가 끼어들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함께 수행했던 ‘백 야전전투사령부’ 참모들과 사령부 요원들을 거의 모두 데리고 왔다. 빨치산 대토벌이라는 거대한 작전을 함께 펼치면서 호흡을 맞췄던 사이였기 때문에 2군단 창설 작업에서도 이들이 함께해 준다면 효율을 높일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2군단 인근에는 이미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미 9군단이 있었다. 나와 함께 남원에서 2군단으로 온 사령부 참모진과 요원들은 미 9군단에 배치돼 그들로부터 군단 창설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배워야 했다. 함께 근무하면서 자체적으로 군단을 운용하는 모든 방법을 그들로부터 배우고 익혀야 했던 것이다.

육군본부로부터 새로운 인사발령이 떨어졌다. 2군단의 신임 참모장으로 이형석(소장 예편·전사편찬위원장 역임) 장군, 부군단장에는 원용덕 준장이 임명됐다. 두 사람은 며칠 뒤 춘천 천전리로 와서 우리와 합류했다.

군대란 그런 것이다. 두 장군은 연배로 따지면 나와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선배였다. 이형석 장군은 일본 육사 입학시험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 합격한 수재였다. 원용덕 장군은 세브란스 의대를 나와 만주군에서 군의관을 지내다가 전투지휘관으로 변신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풍부한 군사지식과 뛰어난 영어실력을 갖췄던 분이다. 그런 두 분이 새로 만들어지는 2군단에서 나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강압적인 지휘관이 아니다. 역시 선배라고 해서 특별히 내가 몸을 과도하게 낮추는 경우도 없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맞게 선배나 후배이건 간에 모두 깍듯이 대하는 게 내 습관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선배와 후배 모두 나를 어렵게 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과도할 정도로 친분을 과시하는 경우도 없고, 그렇다고 늘 까다로운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지도 않는다. 그저 중간이다. 특별히 친하게 지낸다고 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는 반면에, 딱히 멀리하는 사람도 없다. 주변의 모든 인사와 각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모두에게 말이 잘 통하고, 합리적으로 의사를 소통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로 속을 끓이는 법이 전혀 없다. 누구든 편하게 대하면서 사소한 일로는 절대 다투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남과 승강이를 벌인다 해도 공적(公的)인 업무에서나 그러지, 사적(私的)인 문제로는 절대 남과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이형석 장군과 원용덕 장군 모두 인생의 큰 선배이기는 하지만 나의 무난한 성격 덕분에 나이 어린 내가 상관(上官)으로 있으면서도 별다른 문제는 생겨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충분히 예우했고, 두 분 모두 그런 나를 커다란 부담 없이 대했다.

2군단의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미 9군단 파트너가 있었다. 2군단 참모장은 미 9군단 참모장, 부군단장은 저쪽의 부군단장이 파트너라는 식이었다. 분야별 참모들 또한 미 9군단의 해당 분야 참모와 파트너였다. 미군 파트너에게 우리는 모든 것을 학습했다. 내 파트너는 당연히 미 9군단장이었다.

미 9군단장 윌러드 와이먼 소장도 나이와 경력이 자신보다 한참 못 미치지만 계급은 한 단계 높은 나를 깍듯하게 대했다. 내가 그의 집무실을 돌아볼 때였다. 호기심에서 한참 방 안을 기웃거리던 내 눈이 그의 화장실에서 멈췄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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