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보다는 값싼 얼갈이로 ‘김치 허기’ 달래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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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호 10면

‘배추 대란’이라 불리는 요즘 사태는 정말 생전 처음이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밥상머리 살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양배추 김치는, 배추값은 비싸나 양배추값이 그럭저럭 저렴했을 때의 경험이었다. 나도 기억이 난다. 1970년대 초·중반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해엔가 배추가 귀해져 양배추 김치를 해먹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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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 해에는 고추가 귀해져서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마른 고추를 수입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중국산 농산물이 대량으로 반입되지 않던 시절이어서, 고추 수입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때였다. 그해 들어온 고추는 대추처럼 생긴 작은 고추였는데, 어찌나 매운지 기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농산물 품귀 현상이 종종 있기는 했지만, 대개 한두 품목의 문제일 뿐이어서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이 ‘배추 대란’이지, 양배추는 물론 무·상추·파 같은 온갖 푸성귀가 모조리 폭등한 것이고, 그 가격도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점이 예년과 다르다. 배추가 비싸 난감한데 양배추나 상추도 사먹을 수 없는 상태이니 속이 끓는 것이다. 살림 물정에 어두운 분들의 한두 마디 말실수가 그대로 ‘염장 지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입맛이 돌기 시작하여 맛있는 음식을 해먹어야 하는 이 가을에 야채 폭등 같은 이야기나 하고 있으려니 참으로 우울하다. 배추김치 없는 밥상을 견디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어쩌겠는가, 없으면 못 먹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도 뭔가 이 ‘김치 허기’를 달래줄 다른 방도가 없을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덜 자란 배추, 혹은 얼갈이배추로 겉절이를 해먹는 것이다. 조금 ‘위로성 발언’을 곁들이자면, 원래 10월 중순에는 그리 실하고 좋은 통배추가 생산되기 힘든 계절이다. 배추는 2, 3달 정도를 키워야 알이 밴 좋은 배추로 성장한다. 그러니 9, 10월에 출하되는 배추는 모두 한여름에 씨를 뿌려 키운 것들인데, 문제는 배추란 것이 평균 25도가 넘으면 싹도 안 나고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9, 10월에 나오는 배추는 대부분 여름에 시원한 고랭지에서 키운 배추다. 보통의 농촌에서는 8월 초순에 씨를 뿌리고 하순에 모종을 옮겨 심어 김장 배추를 키운다. 그러니 10월의 배추란 아직 통배추 꼴이 되지 못한 어중간한 것들뿐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그냥 덜 자란 푸른 배추로 겉절이를 해먹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시기의 겉절이는 여름의 얼갈이배추보다는, 김장감을 키우다가 솎아낸 것이 훨씬 맛이 있다. 얼갈이배추와 김장용 배추는 아예 종자가 다른데, 김장용 배추는 처음부터 육질이 탱탱하고 맛이 진하며 얼갈이는 길이만 길쭉하며 맛이 좀 싱겁다.

하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된다. 싱거운 얼갈이배추도 비싸기는 마찬가지이니, 이나마도 먹을 수 있으면 감지덕지 아닌가. 살짝 절인 배추에 멸치젓이나 새우젓 같은 젓갈로 짭짤하게 간을 해서 무친다. 마늘은 안 들어갈 수 없지만, 파는 비싸다면 빼도 된다. 대신 양파를 채 썰어 넣으면 아쉬운 대로 괜찮다. 겉절이는 익혀 먹는 김치보다 약간 설탕을 더 넣는 것이 좋다. 먹기 직전에 깨소금과 참기름을 살짝 가미하면 감칠맛이 난다.
혹시라도 김장용 배추의 솎음을 구할 수 있다면, 썰어 담그는
김치 하듯 버무려서 살짝 숙성시켜 먹어도 좋다. 이 계절에 새콤하게 익기 시작한 솎음배추 김치는, 어설픈 통배추김치보다 훨씬 맛있는 계절의 별미다.

무도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웬만한 무 하나에 4000원씩 하는 사태는 정말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이다. 배추보다는 싸니 이것으로 깍두기를 담가 먹으면 돈이 좀 덜 들기는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비싸서 망설여진다면, 좀 양을 늘리는 방법을 써보는 것도 괜찮다. 물을 많이 넣는 동치미를 담그는 것이다.

아직 무가 그리 맛있는 계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썰어 담그는 동치미니 먹을 만하다. 게다가 세상에 쉽고 편한, 가장 기초적인 김치다. 무를 깨끗이 씻어 나박나박 썬다. 그대로 물과 섞어 통에 넣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한다. 무에 간이 뱄을 때를 예상하여, 보통의 입맛보다 좀 짜고 달게 간을 해야 한다. 특히 설탕은 익으면서 초산으로 발효되어 새콤해지는 역할을 하므로, 익고 나면 단맛이 훨씬 줄어드니 그것을 예상해야 한다. 초심자가 간을 맞추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간을 여러 번 맞추는 것이다. 담근 지 하루쯤 지나 무 건더기에 간이 밴 후에 다시 한번 맛을 보고 다시 소금 간을 하면 거의 틀림이 없다.

양념도 별것 안 해도 된다. 생강과 마늘은 얄팍하게 썰어 조금 넣고 쪽파나 파를 길쭉하게 썰어 띄우면 그만이다. 양념을 다져 넣으면 국물이 지저분해지니 썰어서 넣는 것이다. 설탕 대신 배와 양파, 생강과 마늘을 즙으로 만들어 넣으면 더 맛있기는 하다. 하지만 귀찮으면 그냥 설탕을 쓰고 양념은 썰어 넣어도 무방하다. 파가 없으면 이 역시 양파를 채 썰어 넣어도 아쉬운 대로 괜찮다.

실내에서 3, 4일 지나면 국물에 거품이 생기면서 새콤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이때 국물 속에 잠긴 건더기와 뜬 건더기가 다른 속도로 익으므로, 전체를 휘저어 주는 것이 좋다. 간이 불안하면 이때 다시 한번 맛을 보라. 단맛이 현격하게 달라져 있는데, 이때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다시 한번 간을 맞추면 좋다. 이런 방식으로 한두 번 해보면, 처음부터 간을 맞추는 데 능숙해진다.

동치미는 물이 많이 들어가므로 무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작은 무 하나만으로도 통이 꽉 차고, 큰 무는 반 개 정도만 해도 넉넉한 양이 나온다. 나머지는 깍두기로 버무려 놓으면 4000원짜리 무 한 개를 알뜰하게 쓰는 셈이다.

이 밖에도 미역이나 다시마·콩나물 같은 야채들을 많이 먹으면 그럭저럭 이 위기를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김치 허기’야 완전히 해소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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