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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이슈] 이들을 절망케 하는 건 사회의 편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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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한 최모(34.여)씨는 아래층 사람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위층에서 시끄럽게 했다고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들(6세)이 발달장애 1급이기는 하지만 블록 쌓기나 인형놀이에 집착하기 때문에 보통 아이보다 크게 소란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요한작업장에서 발달 및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고무패킹 분리작업을 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장애인 부모 10명이 1000만원씩 내 이 작업장을 만들었지만 운영비가 모자라 애로를 겪고 있다.[최승식 기자]

그래도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수차례 사과하고 과일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괴롭다며 "아이가 그러니(자폐 증세가 있으니) 그렇게 시끄러운 것 아니냐"는 말에 최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최씨는 "아래층 아주머니가 '자폐증이 있는 아이는 무조건 뛰고 소리 지른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어 실상을 얘기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억울해 했다.

자폐 증세가 있는 자식을 둔 부모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 가진 편견이다. 자식 치료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헤쳐나가기도 버거운 판에 편견은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그나마 최근 자폐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이 화제가 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다.

◆경제적 부담에 가정 해체까지=경기도 안성의 용국이(9.가명)는 매일 새벽 아빠 차를 타고 서울시립 아동병원으로 향한다. 병원에서 하루 6시간 동안 언어치료와 행동치료 등을 받는데 한 달에 200만원이 든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용국이를 돌봐줄 사람을 쓰는 데 50만원이 추가로 들어간다.

서울시립 아동병원은 국내 유일의 자폐증 전문 치료 및 교육 센터다. 이 병원에 들어가려면 최장 5년을 기다려야 한다. 용국이도 2년가량 기다렸다. 대학병원에서조차 치료나 교육을 하지 않는다. 벌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종교단체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장애인복지관이 전국적으로 106곳이 있지만 이 시설을 이용하려면 역시 평균 2~3년을 기다려야 한다. 또 들어가더라도 2년 정도밖에 이용할 수 없다.

결국 장애인 부모들은 서울 강남 등에 있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부모들은 하루에 사설 기관 서너 곳을 돌며 아이 치료에 매달린다. 서울 강남구 명우(7.가명) 부모는 그동안 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3억원짜리 아파트를 팔았다. 저소득층은 치료를 포기한다. 서울 광진구 한모(49)씨는 지난 1월 아들 현수(가명.14)를 경기도의 미인가 수용시설로 보냈다.

아이 때문에 부모가 우울증에 걸린 경우도 적지 않다. 경기도 하남시 최모(38.여)씨는 발달장애인인 둘째(10)를 돌보다 애한테 화를 내는 등의 이상 증세가 생겼다.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고 6개월째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2001년 춘천 마라톤을 완주한 영화 '말아톤'의 모델 배형진(23)씨처럼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 배씨는 요즘 악기회사에 취직해 정상적인 생활에 한발 다가섰다.

발달장애 2급인 김진호(부산체고 2년)군은 지난해 10월 열린 전국체전에 수영 부산대표로 참가했다. 발달장애인으로 전국체전에 출전한 선수는 김군이 처음이라고 한다. 어머니 유현경(45)씨는 "수영장만 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진호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며 "3월부터 다른 일반인 대회에도 출전하기 위해 요즘 진호는 일반 학생들과 겨울훈련에 열심"이라고 말했다.

또 박장원(23.발달장애 3급)씨는 지난해 1월부터 서울 송파구 새세대육영회 부속 어린이도서관에 사서보조원으로 일하며 매달 70여만원을 받는다. 패밀리레스토랑인 아웃백스테이크 등 서비스 업체들도 발달장애인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사회가 감싸줘야=이렇게 직업까지 갖는 경우는 아직 드물다. 그래서 부모들은 성인이 된 뒤 자립할 수 있는 작업장과 주거공간(그룹 홈)이 합쳐진 시설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을 취약층으로 보고 국가가 나서 해결해 줘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매우 부족한 상태다.

급기야 부모들이 직접 나서 시설을 세우기도 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요한작업장은 발달장애인 부모 10명이 1000만원씩 모아 설립한 시설이다. 배말인(52.여)회장은 "공간이 좁다는 등의 이유로 정부 인가를 못 받아 월 10만원씩 운영비를 모아 꾸려간다"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정착돼야 부모들이 마음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발달장애인 전문 복지관을 설립하고▶일본처럼 성인 장애인의 통장을 관리하는 후견인 제도를 도입하며▶학교 보조교사를 대폭 늘리고▶일자리를 개발하고 알선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성식.김정수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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