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아버지의 바이올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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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아버지의 바이올린
정나원 지음
새물결, 303쪽, 1만2000원

"전쟁 얘기라면 정말이지 신물이 나요. 제가요, '방공호' 출신이거든요."이렇게 전쟁이란 말만 나오면 진저리를 치는 베트남 처녀 응안은 '72 세대'다. 1972년 동지 섣달, '하노이 크리스마스 폭격'때 태어난 그는 휴대전화로 무장하고 거리를 질주하는 젊은 오토바이 부대의 본보기다. 베트남의 '도이모이(개혁개방정책)'를 이끌어가는 이들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가 풀린 뒤 맞은 '달러 폭격'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부모 세대가 되새기는'사회주의 국가건설'에 대한 긍지와 외세를 물리친'승리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응안은 정나원(40.논픽션 작가)씨가 만나 얘기를 나눈 수백 명 베트남 사람 가운데 하나다. 2002년부터 3년 남짓 각계 각층의 베트남 사람을 인터뷰한 정씨는 그중 11명을 골라 아무도 묻지 않았던 그들의 속내를 육성 그대로 풀어놓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체로 베트남의 살아 있는 역사다. 11편의 드라마는 '아래로부터의 구술사' 또는 민중 자서전으로 읽는 이를 울린다.

"뭐이 바뀔 때마다 꼭 '웃 것들'이 더 호들갑을 떨어요. 전에는 웬수라던 놈들한테까지 손을 디밀고 난리야. 나라 문을 열고 나니까 예전에 왔다 갔던 놈들이 또 와요. 프랑스, 일본, 미국, 한국…. 다시 오는 순서도 똑같애." 골목에서 국수장사로 평생을 보낸 틴 노인은 몸으로 베트남사를 꿰고 있다.

칠순을 넘긴 화가 테비는 젊은 시절, 배낭에 총과 붓을 같이 넣고 다니던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이었다. 배급받은 물감이 너무 적어서 속상해 하는 그에게 친구 화가 부이수언파이는 말했다. "이보게들, 요즘 그림 좀 그렸는가? 물감이 없어서 못 그렸다고? 그래도 자넨 화가가 아닌가, 손이 근질근질하지도 않나. 물감이 없으면 연필로라도 그리게…. 그도 안 되거든 자네 머릿속에라도 그리게나."

베트남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호찌민을 옆에서 도왔던 Q노인은 허름한 방에 앉아서도 가난이 무슨 대수냐는 듯 당당했다. 그의 말에는 긍지가 넘쳤다. "그래도 우리는 나라 이름 아직 안 바꿨어요. 소련은 문패를 갈았지만, 우린 아직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라고."

전쟁과 가난,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외세와 맞서 온 베트남 사람은 우리네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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