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치킨게임’ 시작되면 진정한 강자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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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삼성전자의 기흥·화성캠퍼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생산단지다. 한꺼번에 2500장의 12인치 웨이퍼를 가공하는 화성 12라인에서 한 직원이 장비 가동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200여 명의 직원이 4교대로 근무하며 24시간 가동하는 이 라인에서는 연 1조원어치의 반도체를 생산한다. [삼성전자 제공]

서울 강남에서 용인서울고속도로를 타고 40여 분 달리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 도착한다.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생산지이자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중심지다. 삼성전자의 14개 반도체 생산라인이 누워 있는 눈사람 모양으로 둥지를 틀고 있다. 오른쪽이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자리한 기흥캠퍼스, 1~2㎞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왼쪽 단지가 경기도 화성시의 화성캠퍼스다. 이 회사는 올 상반기 반도체 사업장에 ‘나노시티’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 각각의 사업장을 대학처럼 활동적인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뜻으로 ‘캠퍼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구글이나 HP도 사업장을 캠퍼스라 부른다.

매출 1조원 라인에 직원 50명 근무
추석을 앞둔 15일 화성캠퍼스 입구는 온통 코스모스로 덮여 있었다. D램과 플래시메모리 등을 생산하는 화성 12라인을 둘러봤다. 내부가 축구장 2개 면적인 7층 건물이다. 4층과 7층에 생산라인이 하나씩 들어가 있다. 라인 입구에 12인치 웨이퍼 25장을 담은 밀폐용기가 놓여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반도체 라인은 먼지가 없어야 한다. 회로가 머리카락 굵기의 수백분의 1에 불과해 먼지 한 톨도 불량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가장 깨끗한 ‘클래스1’의 클린룸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30㎝인 정육면체 속에 직경 0.5마이크로미터(㎛)인 먼지 한 개가 있는 수준이다. 1마이크로미터가 100만분의 1m인 점을 감안하면 서울 여의도의 6배 정도 되는 땅에 500원짜리 동전 1개가 떨어져 있는 셈이다. 12라인을 관리하는 정중화 부장은 “2~3년 전만 해도 라인 내부 전체를 클래스1로 만들었는데, 요즘은 밀폐용기에 웨이퍼를 담아 가공하기 때문에 클래스1000 정도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라인에 들어가려면 방진복을 챙겨 입고 두 차례의 에어샤워를 거쳐야 한다. 근무자들은 30분 전부터 담배를 피울 수 없고 화장도 할 수 없다.

메모리반도체의 재료인 웨이퍼는 ‘잉곳’이라고 불리는 원통형 실리콘 덩어리를 가공해 만든다. 12라인에서 쓰는 웨이퍼는 지름 300㎜(12인치), 두께 0.8㎜인 얇은 피자 모양이다. 이 웨이퍼가 한 달 동안 포토·식각 등 7~8개 공정을 거치면 D램과 플래시메모리로 변신한다. 정 부장은 “50만원짜리 웨이퍼 한 장을 가공하면 1000개 이상의 D램이나 300개가 넘는 플래시메모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D램 가격으로 환산하면 700만원이 넘는다. 12라인에서만 밀폐용기 100개에 담긴 웨이퍼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여기가 바로 실리콘 덩어리를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로 바꾸는 현대판 연금술의 현장이다.

50만원짜리 웨이퍼가 700만원으로 변신
추석 연휴에도 삼성의 반도체 라인은 쉼 없이 가동됐다. 오전·오후·야간으로 나눠 4개조가 6일 근무 후 이틀 휴식하는 방식으로 365일 내내 24시간 돌아간다. 추석을 전후해서만 한시적으로 9일 근무 후 닷새 휴식하는 방식으로 바꿨을 뿐이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12라인 옆에 새 공장도 짓고 있다. 신규라인 건설은 3년 만이다. 6조원이 들어간다. 워낙 투자 규모가 엄청나 해외 경쟁사들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익명을 요청한 이 회사 관계자는 “생산량 확대를 통해 현재 35% 수준인 D램 시장 점유율을 연내에 40%까지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닉스도 내년 초부터 30나노 공정으로 D램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치킨게임이 다시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치킨게임은 1960년대 미국의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두 대의 자동차가 마주 보고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먼저 운전대를 돌린 사람은 ‘겁쟁이(치킨)’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다. 끝까지 액셀을 밟다가 큰 사고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상대가 손을 들 때까지 적자를 감수하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을 흔히 치킨게임이라 부른다. 치킨게임은 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기 일쑤다.

첫 치킨게임은 2000년 대 초에 있었다. 미국 정보기술(IT) 거품이 터지면서 2000년 543억 달러이던 메모리반도체 시장은 1년 만에 269억 달러로 반 토막이 났다. 버티다 못한 NEC·후지쓰 등 일본 업체들이 메모리 사업에서 손을 뗐다. 시장은 한국 삼성전자·하이닉스, 독일 인피니온, 미국 마이크론, 일본 엘피다 등으로 재편됐다.

두 번째는 2007년이었다. 대만 업체들이 대거 뛰어들면서 공급이 넘쳤기 때문이다. 2006년 말 당시 세계 5위의 메모리 생산업체인 일본의 엘피다가 세계 7위인 대만업체 파워칩과 손을 잡는다고 발표했다. 황충런(黃崇仁) 파워칩 사장은 “삼성을 따라잡는 것이 목표”라고 공언했다. 이들은 총 1조6000억 엔(약 12조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그해에만 파워칩을 비롯해 대만의 렉스칩·프로모스·난야·이노테라 등이 10억 달러 이상을 D램 공장 설립에 투자했다.

그러나 공급이 몰리면서 반도체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2007년 초 5.9달러이던 512메가비트(Mb) DDR2 D램 가격은 이듬해 9월 0.73달러까지 떨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까지 겹친 탓이다. 그런데도 업체들은 감산을 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당시 치킨게임에서 승리를 거뒀다. 경쟁사보다 1년 이상 앞선 기술로 원가를 낮췄기 때문이다. 엘피다와 파워칩은 적자를 견디다 못해 2008년 말 감산에 들어갔다. 독일 인피니온의 반도체 부문을 분리해 만든 반도체 전문업체 키몬다는 지난해 초 파산을 선언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올 들어 반도체 부문에서 분기당 1조원 이상의 이익을 내고 있다. 3분기에는 흑자가 3조원이 넘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뿐 아니다.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의 가동률은 95%를 넘는다. 거의 풀가동 수준이다. 하이닉스는 올 2분기에 매출이 처음으로 3조원을 넘어섰다. 영업이익도 1조451억원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엘피다는 올 3월 끝난 2009 회계연도에 260억 엔의 영업이익을 내며 3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올 2분기에도 444억 엔의 영업이익이 났다.

‘일본+대만’ 도전 물리치고 주도권 강화
그러나 다시 암운이 닥치고 있다. 최근 반도체 가격은 가파르게 하락 중이다. 대만의 반도체 시장조사업체인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올 4월 3달러에 거래되던 1기가비트(Gb) DDR2 D램 현물가격은 이달 들어 1.8달러까지 떨어졌다. 주력제품인 1Gb DDR3 D램 가격도 4월보다 0.8달러 떨어진 2.1달러다. 지난해부터 꾸준히 상승하던 가격이 약세로 돌아섰다. 3차 치킨게임의 암운이 세계 반도체 전장에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전자 메모리마케팅팀 장재혁 부장은 “경제위기의 여파로 미국·유럽의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D램을 많이 쓰는 PC 판매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당장 치킨게임이 다시 벌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경쟁사들이 심리적으로는 물론, 실질적으로도 큰 손실을 봤기 때문에 당분간은 치킨게임을 벌일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익명을 요청한 증권업계 분석가는 “다시 가격전쟁이 벌어진다면 치킨게임이 아니라 ‘엘리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컴퓨터 게임에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 진지를 초토화하는 것이 엘리(elimination)다. 그만큼 현재 상황에서 삼성 반도체는 기술과 재정상황 모두 경쟁사를 압도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삼성은 같은 D램 가운데서도 부가가치가 높은 저전력 DDR5나 초고속 그래픽램 등의 비중이 크다. 30나노 공정의 DDR3 램은 60나노 공정의 동급 제품보다 전력 소모를 86% 줄였다. PC 수요가 줄면 일반적인 D램의 수요는 따라서 감소할 수 있다. 하지만 저전력이 중요한 서버나 모바일 제품용 D램은 오히려 수요가 늘고 있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PC 수요가 둔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전체적인 반도체 수요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노무라증권은 올해 반도체 판매량 증가폭을 기존의 22.2%에서 30.5%로 늘려 잡았다. 구자우 교보증권 연구원은 “모바일 기기 시장이 확대되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세계 1위인 삼성전자가 가장 큰 수혜를 볼 전망이며, 20나노급 낸드플래시 생산을 준비하고 있는 하이닉스도 내년에는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외 업체들이 감산을 고려하고 있는 반면 삼성전자가 공급을 늘리고 있는 이유다. 이 회사는 7월부터 30나노 공정으로 D램 양산에 들어갔다. 엘피다·마이크론 등은 여전히 50나노 공정이 주력이다. 미세공정을 적용하면 생산성이 크게 높아진다. 회로폭을 더 줄일 수 있어 같은 용량의 반도체를 더 작은 크기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300㎜ 웨이퍼를 가공해도 30나노 공정은 50나노 공정보다 반도체 칩이 60% 이상 많이 나온다. 그만큼 원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의미다. 가격 하락을 감수하고라도 시장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것이 삼성전자의 전략이다.

화성=김창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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