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포럼

지역주민을 정책 투자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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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만금 방조제, 원전 수거물 관리 시설, 사패산.천성산 터널, 한탄강 댐, 원지동 추모공원 등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아직 '준안정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공공정책체계가 거대화하고 사회.경제적 변동이 가속화하면서 이 같은 복합적인 정책문제, 기민한 대응과 조정을 필요로 하는 문제, 그리고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요하는 문제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종전의 수직형 행정조직에서 일상업무에 길들여진 관청이 품의를 올려 처리하는 방식으론 대응할 수 없는 것들이다. 관료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임기 중에 결단을 내리지 않는 이른바 님츠(Nimts:Not in my terms) 현상이 발생하는 게 당연하다.

정책의 결과주의도 문제를 푸는 데 장애가 된다. 한 정책목표를 세우면서 우리나라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고 표명하지만 미국은 "100%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 비슷한 표현 같으나 우리는 한번 실패하면 끝장이고, 미국은 100%를 향해 나가는 성취과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다. 최근 '정책의 종합병원'이란 지적이 나올 만큼 많은 정책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거의가 실행이 안 되고 있는 소위 나포(Napo:No action policy only) 현상이 심하다. 원전 수거물 관리 시설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이런 님츠와 나포가 합쳐져 나타난 사회적 교착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해결방책이 있는가.

최근 의료계에선 병원에서 수술이나 의학실험을 할 때 환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설명한 다음 동의를 구하는 과정(informed consent)이 정착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는 앞으로 공공정책을 추진할 때 처음부터 이해관계자(지역주민 등)를 참여시키겠다고 한다. 여기서 진일보한 것이 지역주민을 정책수요자로서가 아니라 정책투자자로 보는 개념이다. 지역에서 조직된 행동연대는 주민들이 편익을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 모인 투자단(컨소시엄)인 셈이다. 선진국들이 취하고 있는 새로운 접근 방법이다.

또 컴퓨터 네트워크상에서 이뤄지는 여론 형성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네트워크상의 여론은 한 방향으로 향하는 역학이 있다. 우세는 더욱 우세해지고 열세는 더욱 열세에 몰리게 된다. 네트워크상에서 다수파를 만들기는 아주 쉽다.

이에 대해 정부도 네트워크를 통해 문제를 완전히 공론화시켜 사회운동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면서 장기적으로 사회적 진화를 주도해야 한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의 지식과 경험을 한층 필요로 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가 환경정책에 대한 리더십을 갖는 것이다

예컨대 국토건설종합계획법도 지역주민과 지자체의 역할을 강조하고 환경과 국토회복을 중시하는 내용으로 손질할 필요가 있다. 또 최근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것처럼 지역 정치인들이 지역정책에 책임지도록 정책의 달성기한과 재원을 명기한 '지역 성명'을 선언토록 하는 방안도 도입할 만하다.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로컬 네트워크를 만들어 줄 수 있다.

환경정책을 끌고갈 리더는 전문가(스페셜리스트)이면서 전체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며, 주변 시스템 간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건설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참호에 갇힌 전문가가 아니라 사회 각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훈련된 전문가여야 한다. 온갖 대화와 가치논쟁에 기꺼이 참여하는 도덕적 파워도 겸해야 한다. 여기서 변화시키는 리더십이 나온다.

리더십 부재로 의사결정이 늦으면 늦을수록 급진적인 경제적 수법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겪은 실패가 적지 않다.

곽재원 경제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