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환율전쟁과 대공황의 교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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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호 02면

주요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자국의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른바 환율전쟁이다. 미국·중국·일본이 먼저 시작했다. 브라질·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대만 등이 가세했다. 각국이 내세운 명분은 그럴 듯하다. 미국은 글로벌 경제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환율을 조작하는 중국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자국 통화 가치가 적정 수준보다 고평가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했다. 중국은 투기세력에 의한 가파른 위안화 가치 상승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신흥국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를 피해보자는 심산이다.

환율전쟁 명분이 무엇이든 이면에는 자국 이기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을 늘려 일자리를 지켜보겠다는 속셈이다. 이웃 나라 일자리를 희생시켜 내 일자리 챙기겠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환율전쟁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부른 까닭이다.

현재 진행 중인 환율전쟁은 참가국 수나 경제 규모에 비춰 1940년 이후 최대 회전이라고 할 만하다. 60년대에 미국과 독일이, 80년대엔 미국과 일본이 더러운 전쟁을 벌이기는 했다. 이들은 모두 국지전 양상이었다. 지금 환율전쟁과 버금가는 사태를 찾는다면 대공황 직후 금본위제 위기를 꼽을 수 있다.

대공황 때 각국은 투자·생산·소비 급감과 살인적인 실업사태에 시달렸다. 이런 한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이 가장 먼저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금본위제 핵심국인 영국이 파운드화 평가절하를 단행한 것이다. 이후 세계 통화 시스템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미국과 프랑스뿐 아니라 아시아의 태국까지 평가절하 대열에 뛰어들었다.

당시 경쟁적인 평가절하는 보호무역주의와 맞물려 세계 무역량을 급감시켰다. 모든 나라 수출이 줄면서 실업이 급증했다. 자국 일자리를 지키려 시작한 평가절하가 모든 나라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승자는 없고 모두 패자였다. 환율전쟁의 씁쓸한 종말이다.

지금 환율전쟁이 대공황 때처럼 극단적인 파국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불길한 조짐이 보이기는 한다. 미 하원이 중국의 환율조작에 대해 보복관세를 물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대로라면 환율전쟁이 관세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대공황 때 평가절하 사태는 1936년 미국·영국·프랑스 대표들의 회동으로 진정됐다. 사태 발생 4~5년이 흐른 뒤였다. 각국의 내부 문제가 회동의 발목을 잡은 데다 준비 과정 자체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지금 세계는 훌륭한 소통의 장을 마련해 놓고 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다. 올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환율전쟁에 마침표를 찍는 ‘서울 컨센서스’가 도출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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