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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조네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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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테스토스테론 과잉이 남녀 간 불장난으로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15~24세 청년층에서 남자의 사망률이 여자보다 4~5배나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넘쳐흐르는 남성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해 헬멧 안 쓰고 오토바이 타기, 안전벨트 안 매고 과속 운전하기 따위의 정신 나간 짓을 일삼다 헛되이 목숨을 잃는다는 거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고 난 뒤 내내 엇비슷하게 유지되던 남녀의 사망률은 50대에 들어서며 다시금 격차가 확 벌어진다. 심근경색·뇌졸중 등 심혈관계 질환이 주범이다. 55~64세 남성 1000명 중 얼추 다섯 명은 이로 인해 세상을 등진다. 반면 여자들의 경우 대개 70~80대가 돼서야 심장이나 혈관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선진국,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5~10년씩 긴 건 그래서다.

백세인(百歲人) 연구가 톰 펄스(미 보스턴대)는 철분의 상대적 결핍을 원인 중 하나로 지목한다. 철분은 몸속에서 활성산소를 불러일으켜 노화를 촉진한다는 물질.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씩 ‘마법’에 걸리는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철분이 부족해져 노화가 지연되니 심혈관계 질병도 늦게 찾아온단 얘기다. 역으로 적절한 시기에 폐경(閉經)이 되는 것 역시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노쇠한 몸으로 아이를 낳다 죽을 위험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듯 술·담배 덜하고 친구 잘 사귀는 등 여자들의 건전한 생활습관도 큰 몫을 하는 건 물론이다.

이래저래 노년으로 갈수록 ‘여인 천하’가 대세다. 전 세계 100세 이상 인구만 봐도 100명 중 85명이 여성이란다. 추석 귀향길에 둘러본 우리네 농촌 풍경도 다르지 않다. 마치 할머니들이 동네를 점령한 모양새라 ‘할매조네스(할머니+아마조네스)’란 말까지 나올 지경이다. 마을회관이고 밭두렁이고 도통 할아버지 구경하기가 힘들다. 며칠 전 한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서 “테레비가 내 신랑이여”라며 적적함을 내비치던 할머니 모습이 짠하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지 모른다. 늙어서 꼭 필요한 다섯 가지가 ‘마누라, 아내, 애들 엄마, 집사람, 와이프’라는 주변머리 없는 남자들이 홀로 살아남는 것보다야 말이다. ‘황혼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낮엔 보이지 않던 별이 뜨는 법’이라고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노년의 행복을 예찬했었다. 우리 할매들, 부디 오래오래 사시며 다들 그 별을 찾으시기를!

신예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