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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해법…처벌? 무시? 용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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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라크 공격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2003년 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유명한'어록'을 남긴다. 프랑스.독일.러시아 3국이 유엔 안보리의 추가 결의를 요구하며 이라크에 대한 사찰 시한 연장을 요구하자 눌렸던 라이스의 감정이 마침내 폭발했다. 백악관의 한 모임에서 그녀는 "프랑스는 벌주고(punish),독일은 무시하고(ignore), 러시아는 용서 해 준다(forgive)"고 자르듯 말했다.

이 일화는 두고두고 얘깃거리를 낳았다.'늙은 유럽'3개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차를 반영한다는 해석과 함께 국제문제에 대한 라이스의 현실주의적 접근법을 시사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한꺼번에 세 나라를 상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버겁기 때문에 일단 눈엣가시인 프랑스부터 손을 본다는 뜻 아니냐고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발끈했다. 무시당한 독일은 독일대로, 원치 않는 용서의 대상이 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노발대발했다.

'악의 축'으로 낙인찍힌 이라크.이란.북한 3개국에 대한 미국의 분리대응 정책을 보면서 라이스의 어록을 떠올렸다. 이들 세 나라는 용서나 무시보다는 처벌의 대상이지만 그 순서와 절차, 방식은 현실에 맞춰 각각 달리한다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속셈인 듯하다.

이라크는 이미 호된 벌을 받았다. 남은 것은'폭정의 전초기지'라는 훈장까지 달게 된 이란과 북한이다. 리비아처럼 회개하고 미국의 품으로 돌아오면 용서해 줄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두 나라가'돌아온 탕아(蕩兒)'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미국의 냉정한 판단인 것 같다.

매는 아무래도 이란이 먼저 맞게 생겼다. 지난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재선 후 첫 국정연설에서 이란에 명시적인 경고 사인을 보냈다. 미국이 안 나서도 이스라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얘기가 올 들어 미 정부 안팎에서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앞세우고 있다. 국정연설에서도 부시는 북한을 최대한 '배려'했다. 6자회담 재개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동결과 보상'(북한),'폐기성 동결'(미국)이라는 두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한 결과는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가 6자회담에 매달리는 것은 명분 쌓기라는 시각도 있다. 한.중.일 3국이 협조하지 않는 한 북한을 처벌하기 어렵고, 처벌하더라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미국은 잘 알고 있다.

북한 핵 문제가 궤도를 이탈한 것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 때문이다. 2002년 10월 미국은 우라늄 농축을 통한 추가적인 핵개발 증거를 북한에 제시했고, 북한이 이를 시인했다는 것이다. 탈선한 열차를 복구하려면 탈선 지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점에서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윌슨국제센터 선임연구원)이 미 외교정책 전문지인'포린 어페어스'최신호(1.2월호)에 기고한 글('북한이 속인 것인가')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미 정보당국이 제한적 정보를 토대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한 것이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을 통한 핵개발에 착수했다는 확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리슨은 주장한다. 따라서 당면한 위협인 플루토늄을 통한 핵개발 문제에 집중하고 농축 우라늄 문제는 뒤로 돌리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미 우라늄 핵물질을 리비아에 팔았다는 미확인 정보가 미 언론에 유출되는 현실은 미국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처벌인가, 무시인가, 용서인가. 차기 6자회담은 미국의 진의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것 같다.

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