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이슈] 납북자들이 말하는 '실미도'식 특수 훈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1970년 피랍됐다 2000년 귀환한 납북 어부 이재근(65)씨가 증언한 북한의 대남침투 특수훈련은 영화 '실미도'내용과 상당히 비슷했다. 다만 북한 당국의 지시로 이뤄진 훈련이었던 만큼 민간인 거주지를 넘나들며 공작 훈련을 받는 등 공공연한 형태였다.


삶의 연속성을 파괴하고 가족을 생이별시키는 반인륜적인 납북 범죄. 1953년 휴전 이후 북한이 납치해 아직도 그들 지역에서 억류하고 있는 한국 시민은 486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진은 2003년 충남 서천 앞바다에서 '납북자 송환 촉구 결의대회'를 열어 국화꽃을 던지고 있는 납북자 가족모임 회원들.[중앙포토]

이씨가 북한에 끌려간 것은 백령도 남쪽에서 쌍끌이 조업을 하던 자정 무렵. 갑자기 이씨가 타고 있던 배에 다른 배가 붙는 소리가 나더니 총을 든 군인들이 올라왔다. 국군인 줄 알았다 뒤늦게 북한군임을 알게 된 이씨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모두 27명이 끌려가 평양에서 몇 달간을 지낸 뒤 19명은 남한에 돌아오고 8명은 억류됐다. 북한이 '자진 입북'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씨는 당시 상황을 분명히 설명한다. "갑자기 8명만 청진에 견학을 간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그저 교육을 두 달 갔다 왔을 뿐 나머지 사람들이 돌아간다는 건 전혀 몰랐죠." 이씨는 "체격 좋고 가난한 사람들 위주로 남긴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평양 중앙당 정치학교에서 본격적인 특수 훈련이 시작됐다. 우선 총기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미국산 권총을 쓰는 법부터 카빈 소총.자동 소총까지 남한군의 총을 빼앗은 뒤 사용하는 훈련을 했다. 간첩들에게 필수적인 무선 통신도 배웠다.

요인 암살 교육은 물론 시내에 있는 당 간부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가 정보를 캐오는 훈련도 했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가족은 몇 명이고 가축은 얼마나 기르는지 등을 파악해 오는 거죠. 나중에 확인해 맞으면 점수를 받는 것입니다."

혹독했던 것은 해상 침투 훈련과 구보. "처음에는 저수지에서 수영 훈련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괜찮았지요. 그런데 훈련이 계속될수록 가혹해져 나중엔 배를 타고 해안이 아득하게 보이는 곳까지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고는 바다로 떠밀어 버려요. 거기서 낙오하면 죽는 거니까 죽을 힘을 다해 20시간을 계속 헤엄쳐야 했습니다." 이씨가 소속된 조에선 다행히 해상 훈련 사망자가 없었지만 다른 조에서는 몇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구보를 할 때는 완전 군장을 한 뒤 두 다리엔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달고, 어깨엔 모래자루를 진 채 300리(약 120㎞)를 달려야 했다. 역시 죽는 사람이 나왔다. 이씨는 "죽어도 전사 통지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납북자들을 훈련시킨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민간인을 회유해 섬(실미도)에 실어다 침투 훈련을 시키는 동안 북에서는 남한 어부들을 납치해 특수교육을 시켰던 셈이다. 북한의 '124군 부대'가 서울을 습격했던 68년에 납북 억류된 인원이 131명으로 사상 최대였던 점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최근 남한으로 탈출해온 납북 어부 A씨와 B씨는 이씨처럼 특수 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역시 납북 이후 사상 교육과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북에 가족을 두고 와 구체적인 증언을 하기를 꺼렸다.

"회유와 협박을 하는 거지요. 한편에선 잘해주고 한편으론 겁주고. '어차피 미국은 곧 쫓겨나고 가족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며 사상 교육을 시켰습니다." 결국 북한은 남한 어민들을 납치해 일부는 '남파 요원'으로 써먹고, 일부는 체제 선전을 위해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주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