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세계대백제전] 웅장했던 동아시아의 ‘해상강국’ … 1400년 전 백제가 깨어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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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백제전 앞에 ‘세계(世界)’와 ‘대(大)’라는 수식어가 붙으니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백제는 역사에서 패자(敗者)의 이미지가 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상에 남겨진 백제는 뚜렷한 실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다. 하지만 백제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 같은 수식어가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400년 전 백제로 시간여행을 떠나세요.” 2010 세계대백제전이 18일 한 달 여정으로 막을 올린다. 뮤지컬 배우 오기환(왼쪽)· 김혜원씨가 백제 26대 임금인 성왕과 왕비 복장을 하고 백제문화단지 사비궁 천정문 앞에서 관광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김성태 프리랜서]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 ? ~475)은 서기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외교문서)에서 “자국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했다. 실제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 씨(氏)였다. 실제 백제 26대 왕인 성왕은 도읍을 부여(사비)로 옮긴 뒤 “옛 부여(북만주)의 넓은 영토를 모두 탈환하고 백제의 중흥에 힘쓰겠다”는 뜻으로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기도 했다.

이렇듯 백제인들은 자국의 기원을 일관되게 부여에서 찾았다. 스스로 대국임을 내세운 것이다. 백제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를 넘어 지금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가리키는 곤륜(崑崙)과도 교류했다. 백제 성왕 때 활약한 겸익 스님이 인도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술과 항해술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이 때문에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면직물의 유입로는 중국이나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동남아시아로 추정된다.

백제에는 동아시아의 모든 생산물이 집중됐다. 사비시대(538~663년) 백제의 인구는 동일한 시점의 고구려(69만 7000호)보다 많은 76만호였다. 신라 진덕여왕은 “소국이 대국을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라며 백제를 대국으로 인정했다. 신라 왕이 인정하고, 고구려보다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앞섰기에 ‘해상왕국 대백제’로 일컫는 게 당연하다.

고구려를 능가했던 백제는 외국인이 요직에서 활약하는 열린 사회였다. 1400년 전에 글로벌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백제인들의 창의성과 개척정신, 개방성은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자산이다. 우리가 백제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에서 백제(百濟)를 ‘구다라(くたら)’라 부른다. 구다라는 부여의 나루 이름인 ‘구드래’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나루 이름에서 도시 이름이 생겨난 경우는 공주의 곰나루에서 비롯된 ‘웅진’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드래 나루 이름이 백제를 가리켰다면 그 소통의 비중과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아시아 교류와 소통의 중심이 충청남도 부여 땅이었다. 부여 땅에서 백제문화의 부활을 알리는 세계대백제전이 열린다. 충청남도가 대한민국과 세계의 중심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잘못 알려진 백제사를 바로잡고, 충청인과 한국인 전체의 자긍심을 되찾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세계대백제전은 그러한 백제를 체험하는 좋은 기회이다.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만끽하면서 1400년 전 화려했던 백제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도학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경북 문경 출신

■한양대 사학과 박사

 (백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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