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어느 부자(父子) 외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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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학술회의의 주인공은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1373~1445). 천영우 차관은 인사말에서 이예의 업적과 정신을 기린 뒤 “아시다시피 외교부는 지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고, 제게 생각지도 못한 일정들이 생겨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게 돼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했다(어제 아침에 외교부 기조실장 보직대기, 인사기획관은 경고와 함께 외교안보연구원으로 전보, 인사업무가 신각수 제1차관에서 천 제2차관으로 이관됐다는 뉴스가 나온 걸 보니 천 차관이 자리를 일찍 뜬 까닭이 구체적으로 이해됐다).

이예는 조선조의 ‘특채 외교관’이었다. 한낱 지방 고을의 중인(아전) 신분에서 종2품 동지중추원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국가·국민에의 헌신을 생각하면 영의정 벼슬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1396년 이예가 23세 때 왜구가 울산을 침범해 군수를 납치해 갔다. 울산 관아의 아전이던 이예는 남들처럼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왜구의 배에 숨어들어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다. 군수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태도에 감복한 왜인들이 이들을 죽이지 않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이예를 칭찬하며 아전의 역(役)을 면해 주고 벼슬을 내렸다. 사대부 양반이 된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역사에 흔하디 흔한 입지(立志) 스토리다. 그러나 이예의 진가는 이때부터다.

그는 대일외교 업무를 자청했다. 어명을 받은 정식 외교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1401년(태종 1년)이었다. 이후 죽기 2년 전까지 40여 회나 일본을 오가며 국익에 헌신하는 삶이 펼쳐진다. 요즘처럼 아침 먹고 비행기에 올라 점심 전에 일본에 도착하는 시대가 아니었다. 한 번 출발하면 6개월 이상 걸리는, 그것도 현해탄 파도에 생(生)과 사(死)를 맡기는 고난의 출장길이었다. 실제로 59세 때는 바다에서 왜구를 만나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깨진 배에 실려 간신히 귀환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과 오키나와까지 가서 모두 667명의 조선인 포로·피랍자를 귀환시켰고, 죄 지은 왜적 15명을 체포해 오기도 했다. 게다가 물레방아·사탕수수·화포·화폐 등 외국의 앞선 문물을 들여오는 데 기여했다. 평화시에만 활약한 게 아니었다. 1419년 대마도 정벌에는 중군병마부수로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결정적인 것은 문인(文引)제도와 계해약조(癸亥約條)로 조선 초 대일외교의 기틀을 확립한 공로였다.

이예는 43년 외교관 생애의 절반을 파도 치는 바다 위에서 보냈다. 고국의 안락한 집에서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됐겠는가. 가슴 아픈 것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일외교 전문가가 된 아들 이종실(李宗實)이다. 부자(父子) 외교관으로 활약하던 이종실은 부친이 죽은 지 14년 후인 1459년 통신부사로 일본 교토에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바다에서 순직했다.

외교부는 올해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선정했다. 지금 대한민국 외교가 직면한 국제정세는 600년 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가파르다. 우리 외교부에도 이예 부자 같은 인물들이 분명 있을 터인데, 특채니 특혜니 하는 논란에 기들이 죽어 있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안타깝다. 허물은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그러나 헌신과 봉사정신으로 무장한 많은 직업 외교관에게 우리는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외교 없이는 나라의 미래도 없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