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해진 입주자들 … 건설사는 괴로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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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요즘 새 아파트 단지에서 입주자들의 민원이 많이 일고 있다. 계약자들의 각종 요구를 건설사가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데 따른 것이다. 마감재 개선 에서 분양가 인하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택시장 침체로 새 아파트 시세가 분양가를 밑돌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계약자들은 입주예정자 동호회 같은 인터넷카페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건설사에 집단으로 전달하고 있다. 계약자들이 계약서에 없는 내용을 추가로 요구하더라도 건설사는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렵다. 집단으로 입주 시점을 늦추거나 거부하면 건설사들은 잔금을 제때 회수하지 못해 자금난에 빠지기 때문이다.

경기도 용인의 한 아파트 단지 사전 점검 모습. 이 아파트 시공사는 계약자들의 요구에 따라 연체 이자를 절반 깎아줬다.

◆건설사들 “지나친 요구”=“현관문 등의 마감재와 조경을 인근 단지 수준으로 높여주고 중도금 이자와 취득·등록세를 대신 내주지 않으면 잔금 납부와 입주를 거부하겠다.” 올 12월 입주하는 경기도 고양시 D아파트 단지 입주예정자 동호회 카페에 오른 결의사항이다. 그동안 입주예정자 동호회는 아파트 분양 이후 부실공사나 허위광고 등 건설업체들의 위법행위를 감독하고, 교통·교육·편의시설 등의 정보 교류를 주로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파트 품질 업그레이드, 발코니 무료확장, 잔금 납부 기한 연장, 분양가 인하 등을 얻어내는 게 주요 활동으로 바뀌었다. 또 인터넷을 통해 다른 단지의 입주예정자 동호회들과 정보를 나누면서 ‘품질 및 입주조건 상향 평준화’를 꾀하는 게 요즘 동호회의 특징이다. 경기도 용인시 S단지 입주예정자 동호회 이모(40)씨는 “회원들이 다른 단지 정보를 카페에 올려 우리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회원들을 독려한다”고 말했다.

‘아파라치’(계약자들을 대신해 아파트 하자를 찾아내는 전문업체)에 용역을 의뢰하는 것도 특징이다. 입주자 사전점검 기간 중 내부 사진을 찍어 분양 당시 약속했던 것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며 건설사에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다. D건설 관계자는 “준공 허가 전에 건설사의 약점을 최대한 많이 잡아내 입주예정자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아파라치를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집값이 오를 때는 그냥 넘어갈 일도 요즘에는 일일이 문제삼는다”며 “집값이 분양가보다 내려간 만큼 건설사도 계약자들과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게 계약자들의 마음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입주예정자 동호회의 반대파 격인 비상대책위원회가 단지마다 하나 이상씩 만들어지는 것도 신풍속도다. 비대위 측은 입주예정자 동호회가 건설사 측의 회유에 넘어간 ‘어용’이라고 주장하며 동호회보다 더 많은 조건을 건설사에 요구한다.

일부 계약자들은 동호회 활동과 상관없이 스스로 잔금 납부를 거부한 채 해약을 요구한다. 아침 일찍 건설사를 찾아와 아파트 계약 때문에 이혼을 당하게 됐다는 식으로 읍소하는 유형에서부터 해약을 해주지 않으면 실력 행사를 하겠다고 압박하는 경우까지 다양하다는 게 건설사 관계자들의 얘기다.

◆계약자들 “할 말 많다”=입주예정자들도 건설사에 할 말이 많다. 경기도 용인시청 홈페이지 온라인 민원상담실에는 요즘 하루 평균 20여 건의 민원이 올라온다. “분양광고와 달리 부실시공됐으니 준공 승인을 보류해 달라”는 게 많다. 이 달에만 6개 단지에서 이런 민원이 올라왔다.

사기분양을 이유로 법정소송을 벌이거나 준비 중인 단지도 적지 않다. 충북 청주의 S아파트 입주예정자들은 분양 당시 건설사가 약속한 내용과 입주 시점의 상황이 판이하다며 건설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인천시 학익동 P단지 일부 계약자들도 택지지구가 아닌 곳에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분양 때는 건설사가 택지지구 내 아파트인 것처럼 안내했다며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고양시의 S아파트를 분양받은 김모(43)씨는 “거의 다 팔렸다는 분양상담사의 말에 현혹돼 미분양을 계약했는데 입주 때 보니 절반이 남아 있었다”며 “명백한 사기분양이므로 소송을 통해 시비를 가리겠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입주예정자들의 이 같은 집단행동이 심할 경우 뜻하지 않은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아름기획 강주택 사장은 “버티면 건설사가 좋은 조건을 제시할 것이란 기대로 잔금 납부를 미루다가 신용불량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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