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지식인의 죄와 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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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지식인의 죄와 벌
원제:Epuration des Intellectuels
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두레, 256쪽, 1만2800원

▶ 모리악 "국민통합 위해 신의 자비 베풀어야"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된 프랑스 지성계(知性界)는 나치에 협력한 부역 지식인 처벌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국민통합을 위해 '신(神)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인간의 정의'에 따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섰다.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프랑수아 모리악과 알베르 카뮈였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의 쳇바퀴보다는 더 나은 것을 원한다. 우리가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부르주아 작가이며 60대 원로 언론인이었던 모리악은 보복의 악순환을 경고하면서'예수의 자비'를 호소했다.

그러나 나치 치하에서 지하신문 '투쟁'의 편집장으로 대독(對獨)항전에 참여했던 30대 초반의 카뮈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열렬히 옹호한 것은 진실과 정의였다.

"내가 숙청에 대해 말하면서 정의를 외칠 때마다 모리악은 우리가 예수의 사랑과 인간의 증오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다만 치욕 없는 진실을 원할 뿐이다."치욕을 유산으로 물려주지 않으려면 정의가 말하도록 해야 한다는 반박이었다. 복수심과 원한이 들끓는 해방 공간에서 자비가 설 자리는 없었다.

▶ 카뮈 "치욕 없는 진실 원해 정의가 말하게 하라"

과거사 청산 문제가 나올 때마다 거론되는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통해 역사를 바로잡은 본보기로 미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벌였던 뜨거운 논쟁과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인간의 정의'가 초래한 비극과 부작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랑스의 기자이면서 전기작가인 피에르 아술린이 쓴 이 책은 프랑스 역사 청산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해준다.

'지식인의 숙청'이란 원제가 말해주듯 저자는 작가와 기자, 언론사주, 출판인 등 지식인 그룹에 대한 주요 숙청 사례를 소개하고, 왜 지식인들이 다른 부역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지, 지식인 숙청은 어떤 점에서 성공했고 어떤 점에서 실패했는지, 또 그것이 남긴 교훈은 무엇인지 말해준다.

저자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글이 훗날 자신에 대한 사형판결문이 될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역사 청산의 엄중한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본이면서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에 대한 준엄한 경고로 읽힌다.

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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