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통해 보았다 기막힌 현대사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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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임철우씨가 새 장편 『이별하는 골짜기』에서 정신대 위안부의 실상을 복원했다. 임씨는 “불과 70년 전의 일인데도 피해자들의 구술 증언 말고는 정신대 관련 기록이 거의 없어 어이없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소설가 임철우(56)씨가 6년 만에 새 장편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지성사)를 냈다. 강원도 정선의 산골마을 이름이자 간이역 명칭인 ‘별어곡(別於谷)’의 뜻풀이를 제목으로 삼았다. 하필 역 이름이 별어곡이다. 안 그래도 역은 출향(出鄕), 혹은 유전(流轉)에 대한 동경과 불안 속에 만남과 이별이 빈번하게 교차하는 공간이다. 어쩌면 역은, 무한 우주의 시공간에 견줘 한 점 나그네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환기시키는 곳이다. 더구나 간이역이다 보니 상징은 보다 풍부해진다. 단풍잎 같은 열차 차창, 코스모스 핀 철로, 한적한 대합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간이역은 속도·효율 만능의 세태를 역설적으로 고발하는 공간이다.

임씨는 “7, 8년 전부터 횡성 작업실에서 글을 썼다. 강원도를 많이 돌아다니게 됐다. 별어곡역은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곳”이라고 말했다. 빛 바랜 열차 시간표에 화장실조차 재래식인, 묘한 분위기의 역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임씨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이야기가 모아졌다”고 했다. 공간이 소설을 만든 것이다.

공간이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 소설은 임씨에게 낯선 게 아니다. 1984년 임씨의 첫 소설집이자 스테디셀러인 『아버지의 땅』에는 단편 ‘사평역’이 실려 있다. 시인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에 기댄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한겨울 사평 역사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등장인물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변한다. 제적된 대학생, 술집 여급 등 삶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이들은 완행열차를 기다리며 난로 속에 톱밥을 던져 넣는다. 공간은 소설의 분위기, 주제에 깊게 관여한다.

이번 소설에서도 공간 배경인 별어곡역은 인물들을 묶는 요긴한 고리 역할을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티켓 다방의 여급 ‘빨강머리’는 막내 역무원 정동수에게 연심을 품고 불쑥불쑥 역을 찾았었다. 정년을 앞둔 역무원 신태묵은 젊은 시절 자신의 과실로 한 남자가 사망하자 그 아내와 딸을 가족으로 받아들인 후 평생을 죄책감과 광기 속에 사는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다. 정신대 할머니 전순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딱히 갈 곳도 없으면서 매일 역 부근을 떠돈다.

그렇다고 소설이 간이역을 통해 속도전을 비판하거나 이별 풍경을 애잔하게 그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인물 개개인의 비극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건드리는 데 주력한다. 한국전쟁, 80년 광주 등은 그간 임씨 소설의 단골 소재였다. 이번 소설에서는 정신대가 두드러진다. 물론 전씨 할머니의 에피소드를 통해서다.

임씨가 소설을 통해 복원한 정신대 위안부들의 실상은 소름 돋을 정도다. 소설 속에서 전씨 할머니는 열여섯 살이던 30년대 말 정신대로 끌려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혹사당한다. 일본군 위안소는 1년 365일 쉬는 법이 없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바쁜 날은 자정까지 위안부들은 밥 먹을 새도 없이 몸을 내준다. 일자형 건물 안, 중앙에 복도를 두고 마주한 수십 개의 쪽방에 수백 명의 일본군이 몰려 구타와 신음 속에 동시다발로 벌이는 ‘집단 위안’의 현장은 지옥도가 따로 없다.

전순례 에피소드는 전체 300여 쪽 소설의 절반 가량이나 된다. 임씨는 “정신대 피해자들의 구술 기록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전순례 에피소드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임씨의 이번 소설은 아름답기 보다는 무섭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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