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 뉴스] “박정희 비자금 있는데 … 수백억 보증 서줄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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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독일에 사는 이모(53)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국제 투자 전문가로 소개하고 다녔다. 그는 독일의 EBII(European Bank Instrument Investment)와 몬테네그로의 ‘밀레니엄 뱅크 그룹’이라는 은행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지난해엔 EBII가 300억5000만 달러(약 36조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며 특급호텔 연회장을 빌려 축하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씨는 2008년 1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특급호텔 라운지에서 김모(여)씨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해외로 빼돌린 비자금이 내 이름으로 외국계 20여 개 은행에 분산 예치돼 있다”며 접근했다. 그는 “그 원본 예치증서를 갱신해야 하는 데 돈이 없어 못하고 있다. 변호사 비용을 빌려주면 8조원가량을 사용할 수 있도록 위임장을 작성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김씨로부터 지난해 7월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7억2000만원을 받아냈다.

또 지난해 4월 독일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국내 중소기업 R사의 김모 회장을 만나 달콤한 제안을 던졌다. 그는 “계약서·공증비 등 비용만 내면 7000만 달러(약 840억원)짜리 은행지급보증서를 발행해 주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이씨는 김 회장으로부터 지난해 9월까지 비용 명목으로 9000만원을 가져갔다. 또 다른 중소기업 U사의 박모 대표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4억1000만원을 받아 챙겼다.

그러나 이씨의 정체는 사기 전과 12범의 프로 사기꾼이었다. EBII는 자금 유치 실적이 없는 유사 금융기관이었다. 밀레니엄 뱅크 그룹의 경우 자본금이 2유로(약 3600원)에 불과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는 31일 이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씨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HSBC 영국 본점 주소, 연락처, 로고 등이 인쇄된 은행지급보증서 602장을 위조했다. 보증서 발행자란엔 HSBC 고위 임원의 이름을 위조해 서명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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