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용 의상 디자이너 안선영씨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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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 안선영씨

패션쇼 무대나 백화점 매장에서 볼 순 없어도 입는 사람에 대한 배려만큼은 명품에 뒤지지 않는 옷이 있다. 디자이너 안선영(36)씨가 장애인들을 위해 만드는 옷을 그 중에 넣어도 심한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여느 옷과 어떻게 다른지부터 소개한다.

"하반신에 감각이 마비된 분들은 기구를 이용해 정기적으로 소변을 빼내야 하는데, 이 캐주얼 바지는 양손을 쓸 수 있다면 혼자서도 일보기가 쉽도록 한 겁니다. 옆구리 양쪽 지퍼를 내리면 앞섶이 허벅지까지 내려와요. 저 정장바지는 허리에 주름을 넣고 고무벨트와 고리를 이용했어요. 단추나 지퍼를 쓰기 힘든 분도 한 손으로 입고 벗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거구요. 이 와이셔츠는 겉의 단추는 그대로 놔두고 안쪽을 전부 똑딱이로 개조한 겁니다. 일일이 단추끼우기 힘든 분이 주문하신 거에요. 브래지어는 앞쪽에서 입고 벗도록 만듭니다. 찾는 분이 있어서 시중에 비슷한 제품을 구해드렸는데, 결국 불편해서 개조한 겁니다. "

듣고보니 겉보기에는 여느 옷과 다를 바 없던 옷에서 요모조모 새로운 기능이 드러난다. 안씨는 "밥먹고, 옷입고, 화장실가는 일상적인 일을 혼자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라면서 "요새는 독립생활을 하려는 장애인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한다.

안씨는 재작년 봄 '마이리오'(www.my-rio.co.kr)를 열면서 이 일을 시작했다. 회사라고 해도 그가 사장.디자인.옷본제작.자재구매 등등 두루 담당하는 1인 기업이다. 사람마다 장애의 유형과 정도가 다르다보니 사실 대부분의 옷이 맞춤에 가깝다. 거동이 불편한 고객은 집으로 찾아가 치수를 재고 상담을 한다. 거의 전과정이 안씨의 손품과 발품이다.

옷만이 아니다. 사람과 휠체어를 동시에 덮는 우비, 감각이 없는 하반신 보온을 위한 무릅덥개, 휠체어 조종기 덮개, 휠체어에 상체를 고정할 수 있는 벨트 같은 각종 용품은 기성품으로 만들어두고 판매한다. "조종기 덮개요? 복지단체를 통해서 전동휠체어가 많이 보급됐잖아요. 근데 휠체어 조종기에 물이 들어가면 바로 고장이 나요. 비가 오면 외출이 힘들죠. 또 장애인용 택시같은 것도 많이 늘어났죠. 차량안에 휠체어 고정장치는 있는데, 휠체어 탄 사람을 고정할 장치는 따로 없어요."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대로다. 손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숟가락 고정 도구도 마찬가지다. 디자인만 있으면 만들기 어렵지않아 보이는데도 대개의 용품이 많아야 10개, 20개씩 주문되니 하겠다는 곳이 달리 없단다.

의류직물학과를 나와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일했던 안씨지만 그 때마다 새로운 기능의 옷을 만들어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휠체어 조종기만 해도 제조회사와 모델마다 디자인이 각각이라도 어쨌거나 표준화가 쉬운 편에 속한다. "하반신이 불편한 분이 주문한 바지였는데, 세 번 실패하고 네번째까지 만들었어요. 그것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는데, 주문하신 분이 미안한지 그냥 사가셨어요. "안씨는 겸연쩍은 경험담을 들려준다. 연내에 바지를 시작으로, 옷마다 패턴을 정착시켜 기성화의 규모를 넓혀가는 게 중장기 계획이다. 그러면 외부 일손을 빌리는 일이 쉬워질 것 같다.

안씨는 가격을 묻는 고객에게 '백화점에서 옷 한벌 사신다고 생각하라'며 마음준비를 시킨다. 기성품이 아니라서 할인매장같은 가격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지레 겁먹은 기자가 캐물으니 아직까지 안씨의 수고가 별 반영되지 않은 원가 수준이다. 경쟁업체가 사실상 전무한 독점산업인데도 자연히 마이리오의 경영실적은 별로다. 미혼인 탓에 창업지원자금 같은 것을 받기도 쉽지 않다. 아직은 마음이 부자가 되가는 것과 나란히 빚도 늘어가는 단계다.

"패턴작업이라는 게 워낙 섬세해서 1㎜,2㎜를 갖고 따지거든요. 봉사단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를 찾고나니 내가 너무 쪼잖하게 산 게 아닌가 싶었어요. 보통 사람한테도 예쁜 옷을 완벽한 모델이 입으면 당연히 더 예쁘죠. 그런 작업이 제게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했고. 여느 사람은 싼 거, 비싼 거 취향따라 입을 수 있잖아요. 장애인들은 사정이 좀 다르죠. 기왕에 가진 기술, 이쪽에 써보자, 이렇게 된 겁니다"

안씨의 인생궤도가 바뀐 것은 IMF외환위기 때였다. 구조조정이라는 복병을 만나 실의에 빠졌던 그는 국제협력단의 해외봉사단원으로 지원, 방글라데시로 2년의 자원봉사활동을 떠난다. 낯선 이국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된 곳은 뜻밖에도 지역 장애인센터. 다양한 계층과 국적의 사람들과 두루 생각을 나눈 것이 힘이 됐다. 귀국 후 장애인의상을 만드는 자원봉사를 한 것을 계기로 안씨는 재활과학과에 편입,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때마침 서울산업진흥재단의 패션컨테스트에서 1등을 했고, 부상을 밑천으로 6개월간의 해외 연수 기회를 갖게된다. 목적지는 전부터 눈여겨 봤던 독일의 장애인의상 전문회사 '롤리모덴'이었다.

"이런 자켓도 겉보기에는 똑같아도 실은 앞이 무척 짧고, 뒤는 길게 만들어진 거에요.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하루종일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분들은 앞섶이 뭉쳐서 불편하고 안예쁘거든요. "

안씨가 보여준 독일의 카탈로그에는 정장.캐주얼.속옷.신발까지 수십종이 실려있다. 10년쯤 뒤에는 우리네 체형에 맞춘 다양한 장애인의상을 기성품으로 고루 선보여서 "예쁜 옷을 골라입게"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물론 장애인들의 활발한 대외활동을 격려하는 세상의 흐름이 함께해야 가능하겠다.

이후남 기자

※'마이 리오' : 전화 (031)443-0420/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548-6 동광오피스텔 15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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