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든 새벽 조용히 치른 대관식 황제는 반전을 꾀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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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호 01면

고종·안중근·이완용, 창덕궁에서 대한민국 강토(江土)신의 부름을 받다.
100년 전 오늘, 지구상에서 대한제국이 사라졌다.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 선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조상이 물려준 강토를 일본에 빼앗겼다. 국민은 식민지 노예가 되었다. 이 순박하고 머리 밝은 국민들을 어느 누가 무엇 때문에 일본의 노예로 전락시켰던 걸까. 김종록 작가가 세 사람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가상의 역사 대화를 이끌었다.

역사 가상 대화 경술국치 100년의 참회록

2010년 8월 29일 새벽 3시.
“대한제국 태황제 고종 복!”
“대한민국 영웅 안중근 복!”
“대한제국 총리 이완용 복!”

쩌렁쩌렁한 목청 소리에 고요히 잠들었던 자욱한 새벽 이내가 출렁인다. 그 사품에 놀란 눈을 하고 깨어난 추녀마루의 선인, 원숭이, 해치 등속의 잡상들이 기이한 모습을 드러낸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희뿌연 이내가 기와지붕 위로 피어오른다.
창덕궁 흥복헌(興福軒).

주단이 깔린 원탁 위로 촛불이 흔들린다. 홀연히 바람이 일더니 그림자 없는 세 사람이 느낌표 모양으로 출현한다. 밀랍인형처럼 무표정한 그들은 다소곳이 자리에 앉는다.

“오늘은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날이다. 이후로 35년간 이 지구상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통곡한다, 100년 전 그 치욕의 역사를! 그리고 애도한다, 파리하게 쓰러져간 겨레붙이들을!”

허공에서 대한민국 강토신의 음성이 울려 나온다. 셋 모두 움츠러든다. 고종은 눈을 감고 이완용은 고개를 숙인다. 안중근은 주먹으로 펑펑 가슴을 친다.

“아, 하늘이 열린 이래 줄곧 이 나라를 지켜온 강토신이여. 나는 오로지 왕조와 사대부의 나라만을 지켜내려 했었나이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의 참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지요. 민주주의도 채 눈뜨지 못했고 남의 나라를 집어삼키는 제국주의의 마수도 뒤늦게 간파했다오. 그 뒤, 동양평화를 교란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겁니다. 내 절륜(絶倫)한 사격 솜씨는 빗나감이 없었지요. 여순 감옥에 갇혀서야 비로소 국가 결사체의 진정한 의미와 민족의 소중함에 눈떴나이다.”

“안중근, 그대 불세출의 영웅이여. 그대의 장거는 그런 흠결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이완용, 너에게 묻노라. 너는 어찌하여 이 산하를 일본에 넘기는 데 주저함이 없었느뇨?”

“에…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소이다. 누구라도 내 자리에 있었다면 그 또한 나처럼 하고 말았을 거요. 그것이 약소국의 운명이었소.”
이완용은 손으로 콧수염을 연방 어루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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