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0월 경회루 … 볼모로 잡힌 황태자, 강압·매국의 한 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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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진은 침탈의 위세를 담고 있다. 매국의 굴욕이 넘쳐난다. 망국으로 가던 길의 씁쓸한 현장이다. 사진의 사연은 이렇다.

1907년 여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야욕은 험악하게 표출된다. 7월 19일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들었다. 23일 대한제국의 내치 장악(정미 7조약)→31일 군대 해산의 강압적 조치가 이어졌다. 이토의 다음 음모는 황태자 이은(李垠)의 일본 유학이었다. 실제는 볼모로 잡는 것이었다. 한국 황실의 일본화도 겨냥했다. 그는 노회(老獪)했다.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먼저 추진했다. 조선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였다.

메이지(明治) 일왕은 난색을 표시했다. 조선의 의병활동과 정세 불안 때문이었다. 이토가 설득했다. 왕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有栖川宮 威仁) 친왕의 수행을 조건으로 4박5일의 서울 방문을 허락했다. 러·일 해전의 승자인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 을사늑약 때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도 함께 왔다. 그 일행은 10월 16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경복궁 경회루에서 연회를 가졌다. 조선의 대신들과 기념사진(왼쪽 사진)도 찍었다. 친일매국의 정미칠적(丁未七賊)들이다. 이토의 표정에는 조선을 호령하는 으스댐이 드러난다.

두 달 뒤 12월 5일 조선 황태자는 이토에 이끌려 일본으로 갔다. 열 살 때였다. 영친왕(英親王)의 비운의 삶이 시작됐다. 이토는 태자태사(太子太師)의 직책을 받았다.

박보균 기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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