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질린 아내 본 남편, 인질범에 몸 던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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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참극의 충격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참극 직후 7명으로 파악됐던 사망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났다. 홍콩 명보(明報)는 24일 “인질범이 필리핀 경찰과의 대치 과정에서 총을 쏴 홍콩인 8명이 현장에서 숨 졌다”고 보도했다.

목숨을 건진 인질들은 “인질범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필리핀 경찰이 무턱대고 진압에 나서자 인질범이 자포자기 상태에서 총을 난사했다”고 말해 진압 작전의 유효성 논란이 번지고 있다. 도널드 창(曾蔭權) 홍콩 행정장관은 23일 밤 “인질 사건이 다뤄진 방식과 결과에 매우 실망했다”며 진압 방식에 불만을 표시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발생한 관광버스 인질극 희생자의 친척들이 24일 사건 현장을 둘러보며 오열하고 있다. [마닐라 AFP=연합뉴스]

◆아내 구하고 숨진 남편=인질극이 11시간 가까이 이어지다 참극으로 끝나면서 안타까운 사연들도 이어지고 있다.

아내·자녀 3명과 함께 마닐라를 찾았던 렁캄윙(梁錦榮·58)은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인질범에게 달려들다 총에 맞아 숨졌다. 렁의 아내는 “인질범이 좌석마다 한 사람씩 앉도록 하는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나만 앞자리에 앉게 됐다”며 “내가 극도로 공포에 떨자 남편이 인질범에게 달려들다 변을 당했다”고 동방일보·홍콩 문회보가 전했다.

그는 남편이 총에 맞아 숨지자 따라 죽고 싶었지만 두 딸과 아들 생각에 이를 악물고 남편 곁에 엎드려 총격을 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렁의 두 딸은 결국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졌고 아들도 머리에 총상을 입고 치료 중이다. 단란한 가족 여행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바뀐 것이다.

어린이 한 명은 인질범이 여성·어린이·노약자 등 9명을 풀어줄 때 한 여성의 기지로 목숨을 구했다. 명보에 따르면 성이 창(曾·40)인 이 여성이 4세·10세 남매를 데리고 버스에서 내릴 때였다. 이 여성은 버스에 남은 11세 어린이를 발견하고 인질범에게 친척이라며 간청해 이 어린이를 함께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의 남편과 이 어린이의 부모는 총격을 입고 현장에서 숨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사건 초기 버스 뒷자리에 숨어 휴대전화로 홍콩 훙타이(康泰)여행사 본사로 연락해 경찰의 현장 출동을 도왔던 가이드 체팅춘(謝廷駿)도 차가운 주검이 됐다.

◆침통한 홍콩=생중계 화면을 통해 피로 얼룩진 인질극을 지켜본 홍콩 시민들 대부분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홍콩섬 센트럴 금융가의 직장인 루이스 우(吳)는 “홍콩에서 가깝고 여행도 많이 가는 필리핀의 수도 한복판에서 참극이 벌어져 놀랍고 침울할 뿐”이라고 말했다.

명보는 ‘무능한 필리핀 경찰 때문에 홍콩 관광객이 숨졌다’며 인질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지 않은 채 무리한 진압 작전을 편 필리핀 경찰을 비난했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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