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9>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 44.과학적 조사 병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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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유물은 한점도 나오지 않았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거창 둔마리 고려시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법 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벽화였다. 회칠한 벽면은 도굴되는 과정에서 탈락하거나 오랜 세월동안 벽화의 색이 바래 육안으로 확인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일본의 특수촬영 전문가인 이이야마 다쓰오(飯山達雄)씨가 국내에 들어와 남부지방의 무덤 벽화들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화여대 박물관이 이이야마씨를 초청, 일제강점기에 알려진 공주 송산리 6호 백제 벽화고분과 부여 능산리 백제고분, 1963년 발견된 고령 고아동 가야고분, 71년 조사된 순흥 신라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의 벽화 등을 차례로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시 이화여대 진홍섭(秦弘燮) 박물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이야마씨를 거창으로 초청, 둔마리 고려벽화 무덤을 적외선 촬영했다. 발굴조사 도중 무덤 벽화를 적외선 촬영한 것은 둔마리 고려벽화 무덤이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적외선촬영(赤外線撮影) 기자재와 시설이 전무했고 더군다나 촬영 전문가도 없었다. 이화여대는 광복 후 옛 무덤의 벽화를 처음 적외선으로 촬영한 기록을 세우게 됐다.

적외선 촬영 결과 서쪽의 무덤방(石室)에서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벽화를 찾아냈다. 우리나라 문화재 사진작가인 김대벽(金大壁)씨도 초청해 벽화를 정밀 촬영했다.

또 원자력연구소 김유선(金裕善) 박사는 벽화의 미생물을 조사하고 보존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현장 조사를 하고 시료를 채취해 실험하는 등 벽화고분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확보했다. 1년 전 무령왕릉 발굴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실패를 교훈 삼아 과학적인 조사방법을 동원하게 된 것이다.

서쪽 방에서 발견한 인골편은 감정 결과 남자의 것으로 밝혀졌다. 벽화는 오랜 세월동안 습기와 박테리아, 세균 등에 의해 손상된데다 도굴당할 때 외부 공기와 갑작스럽게 접촉되면서 급속도로 건조돼 채색이 많이 퇴색했고 회칠한 상당 부분이 떨어진 상태였다.

벽화 내용은 북한 개성 근처 등의 고려 왕릉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종의 방위신(方位神)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이 아니었다.

모든 그림이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천녀(奏樂天女)를 묘사하고 있었다. 무덤 주인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하늘나라로 인도하도록 축복하는 그림으로 해석됐다. 지금까지도 고려시대 무덤벽화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그야말로 독특한 벽화그림이었다.

발굴조사 결과 무덤을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원상대로 폐쇄해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무덤 외부도 도굴되기 전 상태로 석물(石物)들을 놓아두고 봉분(封墳)은 복원해 발굴조사와 복구를 마무리했다.

벽화가 발견된 무덤 주변에서 같은 형태의 또다른 무덤이 보여 역시 고려벽화 무덤일 것으로 판단하고 이듬해 봄 잔뜩 기대를 품은 채 발굴했으나 조선시대에 회다짐해 마련한 회곽무덤(灰槨墓)으로 드러났다. 부풀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대는 실망으로 끝난다'는 유적발굴 현장의 속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회곽무덤을 발굴했을 때 에피소드를 소개해야겠다. 무쇠처럼 단단하던 회곽(灰槨)을 어렵게 열어 안을 들여다 봤더니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몰라도 시꺼멓게 썩은 물이 가득했다. 썩은물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마을 사람들이 서로 먼저 얻겠다고 아우성치며 몰려들었다.

당황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모두 퍼내 버렸다. 무덤 안의 물은 완전히 썩은 물로 경주 안계리 고분에서 발견했던 천년수(千年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사람이라도 마셨다면 어떤 사고가 발생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무덤은 시신이 빨리 썩어 완전히 흙으로 변하는 곳이 명당이라는 어른들이 말씀을 되새겼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일대 3만1천여㎡(약 9천4백평)는 75년 사적 제239호로 지정해 보존하게 됐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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