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피아니스트 한옥수씨 “아버지의 그림, 세상 사람들과 나눠 보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아버지의 고독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아요. 틈만 나면 홀로 서재에 묻혀 밤이 이슥하도록 붓을 잡던 그 마음이 요즘에서야 통렬하게 느껴지네요.”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선친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하던 피아니스트 한옥수씨는 “아버지가 옆에 계신 듯 그림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했다. [오종택 기자]

원로 피아니스트 한옥수(72·단국대 명예교수, 가원국제문화회 이사장)씨의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24년 전 타계한 선친 한경석(1907~86) 선생을 회고할 때마다 그는 피 내림으로 자신에게 이어진 아버지의 예술가 기질을 떠올린다. 청란(靑蘭)이란 호를 받았을 만큼 화조화와 산수화에 빼어난 솜씨를 보였던 선친은 자수성가한 기업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화가의 길을 접어야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고 홀로 집안을 세운 입지전적 인물이었죠.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한일주식회사를 창설해 후에 한일제약으로 크게 일으키셨어요. 서화에 애정이 깊으셨지만 사정이 이러니 그림과 글씨 공부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죠. 외동딸인 저를 1960년대 초에 미국으로 유학 보내신 배경에는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있을 겁니다.”

한씨는 이런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64년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선 첫 번째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됐다. 66년에는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 교수로 임명됐고,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심사위원에 위촉받았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치는 와중에 한국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버지의 첫 번째 개인전 개최였다.

“날짜도 안 잊어버려요, 69년 4월 18일. 서울신문회관 화랑에서 개막식이 열렸죠. 꼭 가고 싶었지만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순회 연주회에, 강의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던 시절이라 어머니께 부탁해 딸의 이름으로 축하 화환을 보냈죠. 그때 대단했다고 해요. 나중에 신문기사, 사진, 방명록 등을 보니 장안에 유명하다는 화가들은 다 오셨더라고요.”

당시 동양화단을 대표하던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등이 찾아와 국전(國展) 출품을 권유하는 등 선친의 실력을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에 몸이 매인 터라 하루 일과가 끝난 한밤중이나 새벽에 짬을 내 화폭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부친을 지켜보면서 한씨는 그 작품 한 점 한 점에 서린 마음을 읽게 됐다.

“아버님의 뜻을 아는 이 저밖에 없으니 제가 마무리를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물림을 할까 싶었지만 널리 세상 사람들과 나누어 보는 것이 선친의 소망이라 믿습니다.”

한씨는 청란 한경석 화백이 남긴 유작 50점을 전시한 뒤 박물관에 기증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전문가들이 감정한 결과, 작품의 질도 우수하고 보존 상태도 좋다. 한글로 쓴 병풍은 서체가 개성 있고 독특해서 연구 대상이란 평가도 받았다.

“아버님은 말씀이 짧으셨지만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를 툭툭 던지곤 하셨죠. ‘세상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주관을 갖고 사는 것’이란 얘기도 그중 하나였어요. 아버님 글씨와 그림에 나타난 개성이야말로 평생을 견지하셨던 주관의 예술적 표현이란 생각이 듭니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