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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대기업은 대기업 재벌은 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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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대기업과 재벌 구분=盧당선자는 지난 7월 전경련 세미나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준조세도 대폭 정비할 방침이다. 기업이 잘돼야 일자리가 늘고, 노동자들도 골고루 잘살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盧당선자가 문제 삼는 것은 기업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경우다. 그는 이를 재벌 제도의 폐해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재벌의 횡포와 불공정 관행을 막아야만 시장질서가 확립되고 경제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그는 "출자총액 제한, 채무보증 금지 등은 재벌의 행태가 바뀔 때까지 유지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출자총액 제한은 자산규모 5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이 순자산의 25% 이상을 계열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제도이고, 채무보증 금지는 자산규모 2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이 계열사의 빚 보증을 서는 것을 금지한 제도다.

盧당선자는 또 대기업 계열 금융기관이 자회사에 불법으로 자금을 지원할 경우 계열에서 강제로 분리하는 '계열분리 청구제'와 한 사람이 기업에 소송을 걸어 이기면 다른 피해자도 똑같은 보상을 받는 '집단소송제'도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盧당선자의 경제 브레인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교수는 "재벌 총수는 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기업 활동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결국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음주운전 단속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출자총액 제한 등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규제로 외국 기업에 비해 역차별"이라는 입장이어서 집권 초기 재계와의 갈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갑영 연세대 교수는 "큰 틀에서 볼 때 현정부의 대기업 정책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며 "선거 과정에서 여러 재벌 규제책을 제시했으나 시장 영향·반응 등을 고려하면 실천에 옮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사문제 적극 개입=盧당선자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노조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노사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면 정부가 조정자로서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盧당선자는 그동안 "현장에서 노사 분쟁과 갈등을 중재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여러번 말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정부가 조정자로 나서 노사간에 타협을 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개별 기업의 노사관계는 노사의 자율에 맡기되 해결이 안되는 부분은 법대로 처리하는 게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자의 기대심리가 올라간 만큼 새 정부 들어 노사분규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과 근로조건은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盧당선자는 "국내 노동인력 중 비정규직 비율이 56%나 된다"며 "이렇게 가면 노동 유연성이 더 나빠지는 만큼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시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는 비정규직 보호의 필요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만 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하거나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어 적지 않은 진통이 예상된다. KDI는 최근 "비정규직 문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안전망 확대를 통해 해결하고, 규제를 통한 해결보다는 시장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미묘해진 구조조정=盧당선자는 지난달 말 조흥은행 매각과 관련, "정권 교체기의 헐값 매각 시비를 피하기 위해 정부의 일괄매각 방침은 철회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약집에서는 "공적자금 투입 금융기관을 조기에 민영화해 공적자금을 회수하고 금융을 완전 자율화하겠다"고 밝혔다. 상충되는 두가지 발언에 대해 민주당 관계자는 "신중한 매각을 하자는 것이지, 매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그간 국제 입찰을 통한 매각을 취소하면 대외신인도가 크게 떨어지는 만큼 일정대로 매각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이닉스반도체의 경우 채권단의 21대1 균등 감자에 대해 민주당이 차등 감자를 공약한 바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채권단 관계자는 "출자 전환, 부채 탕감 등에 이어 차등 감자까지 하면 금융기관의 손실이 너무 크다"고 반대했다. 한편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 盧당선자는 지난 4월 한 TV토론회에서 "철도·발전 등 망(網)산업 분야의 민영화를 반대한다"고 말했다. DJ정부가 역점을 둬 추진해온 철도·발전·가스 등 주요 공기업 민영화가 새 정부에서 쉽지 않을 것임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고현곤·김영훈 기자

hkkoh@joongang.co.kr

경제관련 말·말·말…

◇재벌 정책

-"재벌은 재벌이고 대기업은 대기업이다. 재벌의 불합리한 경제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 효율이 떨어지고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완된 재벌 시스템 개혁을 다시 한번 챙겨 경제에 부담이 안되도록 바로잡아 나갈 것이다."(12월 20일 당선자 기자회견)

-"출자총액 제한제 등을 유지하고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 대기업 계열 금융회사에 대한 계열분리 청구제도를 도입하겠다."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를 막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금융전업 그룹을 육성하겠다."(10월 8일 경실련 토론회)

-"상호·순환 출자로 얽혀 있는 '문어발 기업덩어리'를 재벌이라고 할 때 자본적 유착관계를 끊고 각기 독립기업으로 따로 서라는 의미에서 재벌 개혁을 말한 것이다. 재벌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5월 17일 방송기자클럽 토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한적으로 경찰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 재벌의 정경유착 관행을 근절하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겠다."(공약집)

◇산업 정책

-"자동차·철강·조선·전자 등 주력 산업을 세계 최강으로 발전시키고 IT 등 미래 신산업을 중점 육성하겠다." "성장 및 고용 창출에 기여도가 높은 물류·유통 등 핵심 서비스 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공약집)

-"벤처 사기사건이 있었지만 실패는 아니다. 벤처는 앞으로도 우리 경제의 희망이다. 벤처는 실패를 각오하는 것이다."(12월 10일 2차 TV토론)

-"기업에 대한 규제는 획기적으로 폐지하는 방향으로 전면 재검토돼야 한다."(7월 27일 전경련 세미나)

◇노동정책

-"강한 노조가 있는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동 유연성이 떨어지지만 그외의 많은 부분에서 한국의 노동 유연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노동 유연성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노사 합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12월 20일 당선자 기자회견)

-"우리 경제 실정에서 노조가 사사건건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사측의 경영정보 공개 등 정보 공유 수준의 참여는 필요하다고 본다. 공무원노조에 단체행동권 부여는 시기 상조다."(9월 24일 중앙일보 인터뷰)

-"대기업들은 노동의 유연화를 좀더 수용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정책은 보완해야 한다."(5월 14일 관훈클럽 토론)

◇농업정책

-"시장 개방으로 농민이 피해를 보는데, 보상대책을 충분히 만들어 보상계획과 개방협약이 한꺼번에 통과되도록 하는 것을 제도화하자."(12월 10일 2차 TV토론)

-"농어업 예산 10%를 확보하고, 농어촌특별세 기한을 연장하겠다. 농산물 가격 하락에 따른 농어민의 소득보전을 지원하고 장기 분할 상환 등으로 농어민 부채를 경감하겠다." "농어촌복지 특별법을 제정해 보건·의료·교육 등 종합적인 농어민 복지 체제를 구축하겠다."(공약집)

◇주택정책

-"주택 보급률 자체는 무의미하다. 지역별 수급불균형을 시정하고 살만한 주거 개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철저한 투기 차단책을 시행하겠다."(9월 30일 선대위 출범 연설)

-"투기지역에 중과세하는 탄력세율 제도 도입이 바람직하다. 현 정부의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은 전반적으로 옳은 방향이다."(중앙일보 정책검증 설문)

-"임기 중 국민 임대주택 50만가구를 포함, 총 2백50만가구의 주택을 공급해 중산층·서민의 주거 안정을 실현하겠다."(공약집)

◇지방경제·과학기술 등

-"지방 대학을 집중 육성해 지방산업을 이끄는 센터로 만들어야 한다. 행정수도 이전으로 전기가 마련될 것이다."(12월 10일 2차 TV토론)

-"기초과학 분야의 투자비율을 전체 연구·개발(R&D)의 25% 수준으로 확대하겠다. 이공계 대학생 3명 중 1명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이공계 인력을 우대하겠다."(공약집)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친(親) 노동자 성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선 이후 근로자들의 기대심리는 크게 높아지고, 기업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0일 대통령 당선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주목할 만한 두가지 발언을 했다. 하나는 노동의 유연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기업은 대기업, 재벌은 재벌'이라며 대기업과 재벌을 구분한 점이다. 이 두가지 발언을 놓고 볼 때 盧당선자는 개혁 과정에서 합리성과 현실성을 상당히 중시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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