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30. 서편제(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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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93년 8월 11일 단성사에서 열린 '서편제' 관객 70만명 돌파 기념행사 장면.

영화 제작자로서 마지막 꿈이 있다면 '서편제' 같은 영화를 다시 한번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만큼 '서편제'는 내 영화인생의 금자탑이었다. '서편제' 얘기를 하려니 벌써 가슴이 뛴다. 엔도르핀이 솟고 피가 뜨거워지는 것 같다. '서편제'는 뭐랄까, 하늘이 내린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복기(復棋)를 해봐도 어떻게 우리가 그토록 절묘한 수(手)를 두었을까 신기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그러나 모든 영광의 길이 그렇듯이 처음엔 의혹과 불신이라는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1993년 4월 10일 토요일, 단성사를 찾은 나는 얼굴이 하얘졌다. 전체 좌석 1117개 중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이날 하루 관객은 1800명. 개봉 첫날 스코어로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3000명이 안 되면 1주일짜리라고 말할 때인데 그 숫자에도 못 미치니 당장 간판을 내려야 할 판이었다.

이거 야단났다 싶었다. 기자들한테 창피하기도 했다. 도하 각 신문들이 '서편제''서편제' 하면서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실어줬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드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시사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기자들이 입소문을 내 당초 2회만 하기로 했던 시사회를 여덟 차례로 늘렸을 정도였다. 시사회 분위기나, 개봉 전 신문에 난 기사 크기로 보면 평균 이상은 관객이 들어야 했다. 물론 엄청나게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판소리 영화'가 돼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더라도 이 정도로 초라할 줄은 몰랐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화요일 아침 직원들을 모았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질지 모르겠다. 다들 긴장해라. '서편제' 이렇지, 다음에 개봉하는 '화엄경' 빤하지. 줄줄이 돈 까먹는 일만 남았다. 기획 중인 영화들 다시 한번 꼼꼼히 체크하고, 돌파구를 찾을 묘수들을 생각해봐라." 내 답답한 마음을 실어 직원들에게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은 극장에 나가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밤에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전날보다 3명이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통상 관객 분포는 주중으로 들어서면 하향곡선을 그리게 돼 있다. 한 명이라도 더 는다는 건 아주 예외적이다. 그런데 수요일은 전날보다 또 7명이 더 들었다. "어, 이게 뭘 말하는 거지?" 20년 가까이 극장 일을 해오면서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점점 불어나더니 마침내 4주째가 되자 첫회부터 심야상영까지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이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이 YS(김영삼 전 대통령)였다. 청와대로 필름을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다과회 자리에서 YS가 오정해에게 판소리 한 대목을 시켰다. 이 장면이 그날 밤 9시 뉴스에 나가면서 '서편제'는 온 국민적 관심사가 됐다. 취임 초기의 YS는 인기가 아주 높았다. 'YS가 극찬한 영화'라는 것은 대단한 프리미엄이었다. 기업체 간부들 사이에도 "(대통령이 봤다니까) 꼭 봐야 할 영화"라는 인식이 퍼졌다. 거기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나가있던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귀국한 바로 다음날 단성사를 찾자 '서편제'는 걷잡을 수 없이 바람을 타게 되었다. 영화와 정치가 이토록 절묘하게 결합한 것은 한국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서편제'의 힘은 영화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 권력 다툼과 이윤 경쟁으로 삭막해진 정치인, 경제인들도 울려버릴 만큼 신묘한 저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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