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는 길이 무섭지 않아요'
보람이의 한마디 때문에
새벽까지 문을 닫지 못합니다
그녀의 떡볶이엔 특별한 덤이 있습니다
사랑
2003년 12월 어느날 경기도 일산의 한 포장마차. 여주인 박은영(33)씨는 새벽 2시가 다 돼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평소 자정이 넘으면 문닫을 채비를 하지만, 연말이라 늦손님이 많았다. 팔다 남은 떡볶이와 순대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여고생 한 명이 빠끔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아줌마, 떡볶이 있어요?"
찬바람에 빨갛게 부어오른 양 볼, 그 위로 수줍게 미소짓는 여학생을 그냥 내칠 수 없었다. 은영씨는 막 껐던 가스불을 다시 켜고 떡볶이를 데웠다.
"왜 이렇게 늦게 다니니."
"학원 끝나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오는 거예요."
학생은 포장마차가 집 방향은 아니지만, 컴컴한 골목길이 무서워 돌아간다고 했다. 늘 불이 꺼져 있었는데 오늘은 이렇게 밝아서 너무 좋다고 했다. 보람이(18)와 은영씨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포장마차를 접는 시간은 매일 새벽 2시로 늦춰졌다. 1시가 넘으면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지만 그래서 더 어둡고 무서운 길을 지날 보람이를 생각하면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하루 14시간을 서 있어야 하는 중노동.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도 종알종알 떠들며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면 피로가 다 풀리는 듯했다. 인사만 하고 지나칠 때도 있었지만 아이의 밝은 얼굴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남편(43)의 회사가 부도난 후 직접 생업전선에 뛰어드느라 친정에 맡겨놓은 아들(7) 생각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 1년 여가 지났다. 지난해 12월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그동안 우리 딸아이를 보살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사는 김에 하나 더 샀어요." 그녀는 "오래 서 있어도 피로가 좀 덜할 것"이라며 발매트를 내밀었다.
수능시험을 치른 보람이는 이제 낮에 가끔 들를 뿐이다. 하지만 손님이 끊긴 포장마차에서 눌어붙는 떡볶이에 어묵 국물 부어가며 밤을 밝히는 은영씨의 하루는 계속되고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또 다른 보람이를 위해서다.
"기쁨은 전이되는 거잖아요. 내가 누굴 즐겁게 하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이를 기쁘게 하고…."
은영씨의 꿈은 탁아소를 만들어 많은 엄마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것. 그 꿈이 이뤄질 때까지 포장마차의 불은 거리를 환하게 비출 것이다.
아무리 거칠고 험하다 해도 따스한 정(情) 한 방울에 세상은 살 만한 곳으로 변한다. 꼭 지갑을 열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거창한 자원봉사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만이다. 그렇게 나누는 정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을 바꾸는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다.
글=이훈범 기자<cielbleu@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