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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길 찾아 나서는 老순례자의 사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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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허만하(70)시인의 시와 산문을 읽으면 아주 긴 글이 쓰고 싶어진다. 이성과 감성, 의미와 무의미, 있음과 없음의 틈새가 곧 우리 꿈이요 사랑이요 삶이라는 것을 집요하면서도 유려하게 파고들어가는 긴장된 생명체로서의 그의 글은 독자들의 심금과 명징한 이성을 딩딩 울린다. 그리고 금세 독자들도 그 넓고 깊은 세계를 함께 거닐게 하며 독자 나름의 또 다른 사유, 글을 쓰게 만든다.

"낯선 지형이 풍경이 될 때까지 날개를 젓는 새.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여는 날개를 위하여 하늘은 있다. 하늘은 해맑은 가을의 깊이를 위하여 있다. 빈 하늘에 걸려 있는 눈부신 옥양목 한 필. 길이 없는 땅 끝에서 물줄기는 수직으로 선다. 냉혹한 낙차를 부들부들 떨며 떨어지는 물소리. 일거에 몸을 던지는 결단의 수위를 아슬아슬 한 뼘 더 높이 날아오르는 시 한 줄의 외로운 높이."('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시작한다'전문)

1957년 등단한 허씨는 69년 첫 시집 『해조』를 펴낸 이후 30년 만인 1999년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내놓으며 문단을 아연 숙연케했다. 지난 30년간 시대 조류를 좇느라 혼은 없고 껍데기만 남은 우리 시에 '외로운 높이의 시 한 줄'의 시혼을 깃발처럼 나부꼈기 때문이다. 이번 세 번째 시집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에 실린 시 80편에서 허씨는 삶의 길 위에서, 아니 그 길이 끝나는 아슬아슬한 곳에서 부들부들 떨며 다시 길을 내는 결단으로서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아가미가 걸쾌에 꿰어 입을 벌린 채 덕장에 매달려 매운 갯바람과 차운 햇살에 내장을 비운 마지막 체중을 말리고 있는 명태 몸매의 나열은 슬프다.(중략)산란을 위하여 오직 알을 풀기 위하여 동해안 북녘 군청색 물빛을 떼지어 찾아온 싱싱한 본능의 끝은 슬프다. (중략)사랑에 대한 어미의 한량없는 배고픔. 배고픔은 정직하다.형형색색의 목숨들이 가지가지 고유한 몸짓으로 배고픔과 싸우고 있다. 세계는 얼마나 많은 배고픔을 숨기고 있는가."('세계는 숨기고 있다'중)

추운 겨울날 동해안 명태 덕장을 바라보며 쓴 시다. 이번 시집은 '풍경의 시학'으로 불릴 만큼 길 위에서 만난 낯선 풍경들을 담고 있다. 굽이를 돌 때 마다 달라지는 풍경들을 허씨는 자신의 지난 삶과 열 트럭 분의 인문학적 독서 체험을 몽땅 털어넣어 바라본다. 그 때 풍경들은 감추고 있던 근원적 슬픔,우주적 사랑을 한 줄의 시로 드러낸다.

"길 위에 선다는 일은 미지에 대하여 손을 뻗는 일이다.그것은 낯선 세계를 내 가슴으로 수용하여 나의 일부가 되도록 길들이는 일이다. 이 거대한 사건 앞에서 여린 감수성은 언제나 전율한다. (중략)시인은 이러한 나들이를 언어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외로운 순례자다. 시인은 주어진 지도를 버리고 자기의 지도를 만드는 모험가다."

허씨의 세 번째 산문집인 『길과 풍경과 시』는 붓가는 대로 쓴 수필이나 일상사에 대한 잡문이 아닌 그야말로 철학적 엄밀함과 함께 예술적 향기를 지닌 에세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예술과 철학을 바탕 삼아 길 위의 풍경이 어떻게 시가 되고 우주적 진실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풍경의 현상학'으로 읽힐 수 있다. 이번 시집과 산문집을 함께 읽으며 이 춥고 서러운 계절의 것들을 바라보라. 어찌 시인들만이 우주의 외로운 순례자이겠는가.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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