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사기업 설자리 없앨 작정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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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병행 발전'을 국정의 대원칙으로 내세운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기업·금융·공공·노동의 4대 개혁 중 가장 확실하게 개혁된 부문이 기업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중 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은 질과 양에 있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아직 도입되지 않은 집단소송제만 빼고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회제도▶대주주의 의결권 제한▶소액주주의 권한 강화▶집중투표제 등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제도가 도입됐다. 정치적·제도적 약자인 기업 입장에선 무분별하게 도입된 지배구조 규제가 우리 현실과 맞지 않고, 나아가 효율성을 심각하게 해치더라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고 주어진 규제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뭔가 모자라는 모양이다.

최근 정부가 국민과 기업의 돈으로 조성된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주식투자 규모를 늘리고 보유한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강제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명분은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이다. 사외이사제도와 감사위원회 제도, 집중투표제를 도입했는 데도 10%도 되지 않는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경영에 계속 관여하니, 이제는 국민의 돈으로 사기업의 주식을 대량 매입하고 주총에서 의결권 행사를 통해 최고경영자(CEO)도 임명하고 이사도 임명하겠다는 뜻인가?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은행들을 머리 속으로 그리고 있는 것인가?

기금관리기본법에는 원칙적으로 주식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예외조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주식투자를 한다. 증시수요기반 확충이라는 명분이다.

현재 연기금은 6조원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올 10월 현재 주식시장 시가총액 2백69조원의 약 2.2% 규모다. 그런데 내년엔 7조원을 더 늘려 총 규모를 13조원대로 늘리겠다고 한다. 현 시가총액이 유지될 경우 전체 주식시장의 4.8%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의미다.

물론 이 정도로는 의결권을 행사해도 큰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연기금이 모든 종목에 투자하지 않고 일부 종목에 투자한다면 경영장악력은 심각하다. 지난 11월 27일 현재 시가총액이 많은 기업들은 삼성전자(57조원), SK텔레콤(21조원), POSCO(10조원), 두산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각 7조원), LG전자(7천억원) 등이다.13조원으로 한 기업 또는 몇 개 기업에 집중 투자할 경우 국민연금이 대주주가 된다. 한술 더 떠서 국민연금의 30∼40%까지 지속적으로 주식투자를 늘려 2019년까지 1백40조원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국민연금으로 사기업을 공기업으로 만들 작정인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엔 몇 가지 치명적인 의문점이 있다.

첫째,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이 왜 주식투자를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사적연금이야 주식에 투자를 하든 말든 가입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미국 클린턴 정부 시절 공적연금인 사회보장연금의 주식투자 시도에 대해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 등 경제학자들이 "주식시장을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공적연금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함으로써 무산됐다.

둘째, 연기금이 주식투자를 하더라도 의결권 행사를 강제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느 선진국에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을 강제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국민연금의 주인인 수많은 국민과 기업의 의결권 위임을 어떤 논리로 정당화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넷째, 국민이 국민연금에 의결권 행사를 위임했다고 하자. 또 21명의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합리적으로 결정하니 문제가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21명 중 기업측의 사용자 대표는 3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정부인사 7명을 비롯해 특정 시민단체, 노동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지배구조가 과연 객관적인지 궁금하다.

국민연금이 지난 삼성전자 주총에서 특정 시민단체의 입장에서 의결권을 행사한 사례가 과연 객관적인가?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측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는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확대와 의결권 의무화를 강행할 것이 아니라, 차제에 국민연금의 민영화를 포함한 상기의 의문점들에 대해 공개적인 검토부터 우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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