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여중생 치사' 일어났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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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동두천 여중생 치사사건의 무죄 평결로 한국이 들끓고 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상황이다.

그래도 미국인들의 속내가 궁금해 장갑차 운전병인 마크 워커 병장의 구명 및 변호사 비용 모금운동을 벌여온 슈 보건 부인을 찾았다. 그의 남편 역시 주한미군이다. 그는 "석방 소식을 들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터리픽(terrific)"이라는 기쁨의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래도 약간은 미안해 하겠지'라는 예상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사람이 죽었는데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며 따지듯 물었더니 바로 감정적 반응이 쏟아졌다. "반미(反美)감정이 번져 한국인들이 온통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우발적이고 비극적인 사고였을 뿐인데…미군들은 뭐 좋아서 한국에 가 있고, 저는 뭐 좋다고 남편과 이렇게 떨어져 사는 줄 아세요? 도대체 한국 학교에서는 '한국전쟁'도 안가르치나 보죠. 정 우리 보고 철수하라면 철수하죠…".

그는 '수많은 미군들이 그 위험한 한국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데도 한국인들로부터 인정받기는커녕 툭하면 이런 사건에 휘말려 적대시 당하고 고통받는 현실'이 한탄스러워 백악관에 항의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워커 병장의 고향인 조지아주 애틀랜타 서북부 액워스 마을에서는 무죄 소식에 환호성이 이어졌다. 마을 주민들은 지난 16일을 '워커 병장 수호의 날'로 정했다. 한 식당은 당일 매출의 15%를 변호사 비용으로 내놨고, 자원봉사자들은 로스웰가(街)변에 마련한 임시 세차장 수익을 변호사 비용에 보태기도 했다. 반한(反韓)감정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행사에 참가했던 일부 교민들은 워커 병장 석방 소식에 '씁쓸한 안도감(?)'을 느꼈다.

미 법률회사의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에게 같은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떤 판결이 나왔을지 물어보았다. 그는 미국 재판에서는 배심원이 열쇠를 쥐고 있음을 새삼 강조한 뒤 "이 사건은 배심원들을 감정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극적인 요소들―가해자가 군인, 곧 정부인 데다 피해자가 소수인종의 미성년 여학생―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미디어의 등쌀 때문에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미국 전체에 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joonlee@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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