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진의 시시각각

남한 대통령의 이념 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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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같은 논리로 MB는 통일준비보다는 위기관리 대통령이 될 공산이 더 크다. 과도기적 북한 상황에 대처하는 남한의 대통령에게는 이념적으로 확고하며 일관된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에서 대통령이 흔들리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면 중도·보수의 많은 국민이 불안하다. 그렇다면 MB는 그 점에서 신뢰를 주고 있는가.

이념에는 이념Ⅰ과 이념Ⅱ가 있다. 이념Ⅰ은 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한국으로 따지면 건국과 자유민주주의·남북문제 등에 관한 것이다. 이념Ⅱ는 공동체를 꾸려 나가는 방식이다. 세금·복지·노사 같은 경제 이슈나 소수자 정책과 교육규제 같은 사회적 문제에 관한 것이다. 한국인은 지구 최후의 공산주의자들과 살을 맞대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이념Ⅰ에서는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신념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이는 생존을 위한 것이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보를 챙기는 것과 같다. 이념Ⅰ에서는 확고하면서 이념Ⅱ에서는 유연한 게 한국인의 바람직한 이념 구도일 것이다.

MB는 어제 연설에서 중도실용을 다시 강조했다. 그가 얘기하는 중도실용이 이념Ⅱ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보수정권 중에서 MB가 처음도 아니다. 미국 공화당의 부시 대통령과 영국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도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란 이름으로 진보에 다가가는 정책을 폈다. 그런데 MB의 문제는 이념Ⅰ과 이념Ⅱ의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념Ⅱ엔 유연해도 이념엔 확고할 거란 확신을 주어야 하는데 MB는 그렇지 못하다.

MB는 초기에는 이념Ⅰ에 대한 신념을 보였다. MB는 중도·보수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우파의 입장에서 북한·친북·이념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을 겪으면서 흔들렸다. ‘거대한 반대세력’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이듬해 봄 MB는 갑자기 중도실용을 들고 나왔다. 이념Ⅱ에 관한 것이라면 있을 수 있는 정책 전환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념Ⅰ에서도 유연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한 것이다. MB는 대통령 전용기에 친북·밀입북 작가 황석영을 태웠다. 황씨는 평양에서 인민군 장교의 무동을 탔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전범 김일성을 “을지문덕·이순신·세종대왕 같은 위인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대통령의 예기치 못한 행동은 북한과 친북 남한 인사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었다. 그들은 MB가 겉으로는 우파여도 속에는 커다란 이념의 구멍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이란 카드로 MB 정권을 흔들어 보았고 여의치 않자 천안함 폭침이란 공포의 심술을 부린 것이다. 친북 세력은 정권을 만만하게 보고 천안함 조사결과를 내동댕이치고 있다.

MB의 황석영 카드는 북한의 천안함 어뢰와 남한의 한상렬 목사로 돌아왔다. 남북대치라는 현실은 그렇게 냉엄한 것이다. 남한의 대통령이 이념적 사치(奢侈)를 모험할 여유가 없다. 이념Ⅱ에서는 실용적으로 유연하면서도 이념Ⅰ에선 중심을 잡는 대통령…불안한 시대, 불안한 공간은 그런 대통령을 요구하고 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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