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28. 정경유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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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와 미8군 용역조합 장기섭 이사장, 서림산업 김성엽 대표(왼쪽부터).

군납업자 친목회의 업무부장 일에 한창 재미를 붙여가던 1963년 무렵이었다. 220명의 주한미군 건설 군납업자들도 담합 입찰이라는 관행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합 약속을 어긴 건설사가 나왔다. 당초 약속한 입찰 금액보다 낮게 써내 친목회의 룰을 깬 것이다. 80만달러정도의 공사를 절반이나 후려쳐 낙찰받았다.

당장 해당 건설사로 쫓아갔다. 7층 빌딩의 꼭대기 층에 있던 사장실 문을 밀치니 여비서가 막아섰다. 비서를 세차게 뿌리친 다음 또 다른 문을 발로 뻥 걷어차면서 호기롭게 들어섰다.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뒤에서 덩치 큰 사람이 일어서더니 "뭐야 이거?" 라며 노려봤다. 그러나 나는 틈을 주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네가 정OO이야? 네가 뭔데 배신을 때려. 너 죽고 나 죽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창가로 그를 밀어붙였다. 그때 심정으로는 정말 창에서 같이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단한 완력이었다. 힘이나 깡이라면 누구에게도 꿀린 적이 없었건만 이건 보통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용을 쓰고 있는데 관자놀이에서 "찰칵" 소리가 나면서 "야, 이태원! 놔, 그거 놔"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곁눈질해보니 중앙정보부 보안과장인 최모씨가 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아까 난 소리는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였다. 최 과장 뒤에는 지금 S건설 회장으로 있는 최모 사장이 서 있었다. 그는 당시 군납조합 이사장이었다.

"야, 이리 와서 좀 앉아. 정 사장도 이리 오시오." 최 과장은 한쪽 켠에 있던 응접실로 우리를 불렀다. 멱살을 푼 나는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드잡이를 세게 했던 것이다. 알고보니 최 과장 일행도 정 사장에게 따지기 위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친목회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에 담합 입찰에서 이탈자가 생기면 친목회를 도와주고 있었다.

"정 사장, 이러면 곤란해요. 우리끼리 한 약속이 깨지면 달러가 새나가지 않소. 이건 매국 행위요." 최 과장이 반 협박조로 설득하고 있는데 사장 책상에 놓인 전화기가 울렸다. "네, 네. 계십니다. 잠깐만요." 그러더니 최 과장에게 수화기를 넘겨줬다. 엉거주춤 일어나 수화기를 귀에 대던 최 과장이 갑자기 상체를 벌떡 세우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네… 네… 네…" 딱 세 마디를 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사색이 된 얼굴로 소파로 돌아온 최 과장은 나를 툭툭 치면서 "태원아, 그리고 최 사장, 자 어서 나갑시다"라며 재촉하는 것이었다. 나오면서 뒤를 흘끔 보니 정 사장이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건설사 빌딩을 나올 때까지 최 과장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둔기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계속 멍한 표정이었다. 거리를 좀 걷자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근데, 최 과장, 누군데 그러십니까?" 그는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나직이 속삭였다.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야." 내가 소란을 피우자 정 사장이 직원에게 청와대에 전화하도록 한 모양이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중앙정보부보다 더 센 권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까지 정보부가 최고인 줄 알고 있던 나는 권력의 새로운 면을 들여다본 것 같았다. 이후 수십년간 한국 사회를 덮게 될 정경유착의 씨앗이 그때 이미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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